1. 사람마다 고향이 있다. 유년의 추억이 살아 쉼쉬고 선대의 터전으로 항상 어머니 품처럼 아늑한, 힘들고 어려운 객지생활에서 한숨을 돌려 세우며 다시 기운을 내게 하는, 그리해 향수병 앓는 사람들의 빈 가슴 한켠을 채우는 그런 고향이 있다.
2.경찰이란 공직에 몸담으면서부터 시작된 유랑, 그 떠돌이 생활에서 우연히 맺은 아름다운 인연, 남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애잔한 삶들과 만남.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시퍼렇게 날이 선 고단함에 베여 상처투성이인 내 인생에 ‘남해와의 인연’이란 터닝포인트가 찾아올 줄이야 어떻게 상상했으랴. 어찌 이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앵강만 신새벽 물안개와 눈 시린 달빛, 다랭이마을 한폭의 낙조와 편백림 천상의 오솔길 산책, 설흘산의 벼랑 병풍을 질투하듯 곁에서 내달리는 한려해상 푸른 바다내음.
낯설은 아름다움… 그 조우가 주는 이상한 어색함, 마음 깊은 곳에서 가슴 시리도록 떨려오는 울림은 여태껏 지나온 내 찌든 삶의 뒷그림자가 얼마나 긴 그리움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지를.
얼마 시작하지 않은 남해생활의 초입에 나에게 그렇게 울부짖고 있다.
3.경찰이란 고된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도시와 사람들을 만나고 머무르면서 또 떠나길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저 그런 일상의 반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덤덤하고 별 의미없는 도돌이표 만남과 이별임을 부인할 길 없다.
충무공의 바다, 남해대교 건너 충렬사 참배를 시작으로 경찰서장이란 치안책임자로서의 첫 순정을 고스란히 바친 순결의 땅, 남해. 막걸리 한사발도 제대로 들이키지 못한 채, 매사에 어설프며 섣부르고 덜 여물은 나에게 무한한 애정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이 땅의 많은 인연들과 더불어 150여명의 남해경찰 동료들은 내 경찰인생에 결코 작지 않은 느낌표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노인대학 특강명분으로 오랜 인고의 세월동안 이 땅을 굳건히 지켜온 지역어르신에게 첫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물섬의 아름다운 청년 도립남해대학생들에게 희망을 얘기하고, 얼마 전에는 미래주역이 될 중ㆍ고교생에게 함께 꿈을 꾸자고 할 기회를 가졌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남해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1년간의 특이한 만남이라 하겠다. 그 또한 행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귀신이 농사짓는 곳이 남해란 말을 신천지마냥 구경할 수 있었다. 시금치, 벼농사, 마늘농사가 무슨 도깨비농사도 아니고 숨가쁘게 회전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며, 아직도 순수하게 이 땅을 가꾸고 사는 삶, 90도 꺽인 허리춤을 부여잡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그 삶들이 이 아름다운 남해를 굳건히 흔들리지 않게 지키고 선 버팀목이요, 미래의 자손들에게 물려줄 황금 터전의 훌륭한 파수꾼임을 난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그래서 난 남해의 미래를 자신한다. 가까운 장래에 대한민국 최고의 미래행복도시, 최고의 휴양지로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본다.
그때까지 공짜와 보상심리에 젖어 소탐대실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이토록 아름다운 산천과 그 속에 살고있는 사람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질만능주의에 길들인 외지인들에게 이 터전을 야금야금 뺏앗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난 자신있게 설전을 할 준비가 돼 있다.
4.이런 남해와의 인연이 내 유년의 가슴 시린 세월을 담고 있는 어르신 땅보다 더 아련하게 생을 파고들어 이제 내 작은 인생사의 한페이지를 기록하는 것으론 부족해 내 장년의 전부를 차지하려 한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땅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보다 더 장년의 망설임을 흔쾌히 녹여줄 땅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난 한치의 눈치보기나 주저함 없이 경찰 인생의 기로에 서서 기꺼이 이 공감을 받아들이려 한다.
경찰서장으로 지역봉사에 많이 부족했던 나에게 혹여 떠날 때 남해군민이 허락한 명예주민증이라도 쥐어준다면 언젠가 그 인증서를 소중히 품에 안고 의기양양 꼭 다시 돌아오고 싶다.
남해를 그냥 그리운 이름으로 기억하기 보다는, 나도 그 따스한 품속에서 동행자고 되고 싶은 게 솔직한 바람이다.
나도 나의 미래짐작에 온몸을 던져 그 속에서 함께 확인하고 싶다. 내 미래의 보석상자가 열림을 그 누군가에게 목청껏 외치고 싶다. 내 경찰서장 좌충우돌 유년의 고향은 … “남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