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무섭다. 못미더운 나라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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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무섭다. 못미더운 나라가 싫다’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1.06.16 15:28
  • 호수 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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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앗아간 한 사람의 인생, 이동 화계 조명래 씨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 공헌하거나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을 예우하기 위한 호국보훈의 달. 하지만 나라를 잃어 가족을 잃고 삶을 잃은 그들은 언제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수 있는 것일까. 일제시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잃은 조명래(이동 화계ㆍ70) 씨의 안타까운 삶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제.

1942년, 엄마 뱃속에 2개월째 있을 때였제. 아버지가 밥 먹다가 잡혀갔던 게 말이야. 강제징용된 아버지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던 큰아버지는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

국민학교 다니기 전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랑 같이 살았제. 그런데 8살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니까 할머니가 막 움성 ‘너거 엄마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 케여. 딴 데로 시집 간거제.

처음에 그 소리 듣고는 어리둥절했었제. 그 다음에는 원망스러웠어. 그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가 다시 씩씩하게 학교를 다닐수 있었어.

그리고 얼마 뒤에 일본에서 보상차원에서 우리한테 50만원을 보냈데. 할아버지가 그거 받고 ‘큰 아들 작은 아들 둘인데 왜 이것밖에 없나’ 물었더니 나라에서 큰아버지는 명단에 없다고 한기라. 큰아버지는 도대체 뭣땜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거고. 그야말로 개죽음 아니가.

아들을 둘이나 일본에 뺏긴 우리 할아버지, 그 이야기를 듣고 혈압이 올라가 돌아가셨제. 할머니는 내 초등학교 졸업반 때 노병으로 돌아가셨고.

고난이 고난을 낳았다. 그러나 고난에 파묻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아였제.

고모가 있어서 찾아갔었는데 다 먹고 살기 바빠서 내치셨고 한 동네 사는 육촌 형님이 도와줘가 같이 살았제. 다른 집에 소먹이도 주고 소몰고 풀도 먹이고 풀 베고 머슴살이도 했어. 머슴살이 살던 집에 나무를 해주려고 바위에 올라서 나뭇가지를 떼내려다가 떨어지면서 팔이 잘려나갔제. 16살 때 일이야.

읍으로 가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피가 땅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소리, 뼈를 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어. 그때 기분이야 그냥 죽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었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너무 막막했었고. 그래도 고맙게 육촌 형님이 마을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내줬어.

그런데 내가 어릴 적에 못살아서 그런지 가난한 애들은 공짜로 막막 내줘가지고 남는 거 없이 사업에 실패해버렸제. 그뒤로 동네 이장님 밑에서 잔심부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아는 선배 소개로 한국전력공사 남해출장소에서 수금도 하고 전기하는데 쫓아다니면서 기술 배워가 한손으로 전봇대 타면서 전기수리해주면서 먹고 살았어. 그때쯤 각시를 만나 결혼도 하고.

내 밑에 자식이 1남 2녀인데, 우리 아들이 엄마 닮아가 잘생겼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나 닮았다고 하대.

‘나라가 해준게 뭐꼬’

나이 들어가 사람들이 국가유공자, 국가유공자 카데. 그래서 나도 신청할라꼬 했디만 그서 ‘강제징용으로 잡혀간 것은 안돼요~’케여. 나라에서는 일본서 보상받아다가 포항제철하고 고속도로 닦는다고 돈 다썼제. 정작 피해를 입은 우리들은 이렇게 못죽어서 살고 있는데. 어렵게 사는 국민들 위해서 해주는 것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말이다,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가 1952년에 ‘합의이혼’했다고 서류에 돼있데. 십년전에 일본에 잡혀간 사람이 어떻게 합의를 할 수가 있노. 또 우리 각시가 청각ㆍ언어장애인인데 보건복지부에서 중복장애 인정안된다 카데. 그래서 막 따졌드만 다음날 된다케여.

왔다갔다 도대체 뭘 믿어야 하네. 텔레비에서 보이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고, 내가 이때까지 당한 거 하며… 어떻게 나라를 믿겠네, 뭘로 믿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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