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사장 요리 찾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봉사할 것”
상태바
“원 사장 요리 찾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봉사할 것”
  • 김광석 기자
  • 승인 2011.06.23 14:20
  • 호수 2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향토기업과 그 CEO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 <11> - 24년 전통 중화요리전문점 해양大반점 원종성 대표
주원빌딩 시절인 2003년 그는 남해청실회 회장을 맡아 사회단체장으로서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해냈으며, 2005년에는 부총재까지 맡아 14년간의 청실회원으로서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어 그는 새남해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사회봉사단체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는 청실회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후배들을 만나면 사회봉사단체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말한다. 남해자애원 아이들에게 남몰래 자장면을 선물하거나 사회봉사단체가 봉사활동을 나갈 때 빠지지 않는 자장면 봉사는 모두 그가 자원한 것이다.  

아무튼 주원빌딩시절 10년 역사는 해양반점을 지금의 먹자골목 시대로 이끌었다. 해양大반점은 보통의 중국음식점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급스러움을 갖추고 있다. 해양大반점이 남해의 음식문화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자긍심을 그는 자신 있게 말한다.     

“업을 한다는 것은 군민들과 구두약속을 한 것입니다. 언제든 해양반점에 가면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제가 군민들에게 한 구두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바로 제가 천직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  

그는 해양반점만의 맛을 아는 고객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간에 아내가 “지금 바쁩니다”라고 전화를 해오면 그는 즉시 달려간다. 그가 직접 요리하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4년간 해양반점을 키워주셨던 분들에게 제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은 해양반점만의 맛을 낼 수 있는 좋은 재료와 정성을 다해 조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업에 충실하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처음이자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냥 해양반점이던 때와 大자를 넣은 해양大반점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 가장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의 그의 입술은 앙다물어졌으며 눈동자에서는 광채가 발산되는 것 같았다.

“본업에 충실하니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 오더이다”

한우물만 파야 성공한다는 격언, 그 우물을 파오면서 ‘아! 이것이 나의 천직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 오늘 만나는 사람은 24년 전통을 자랑하는 중화요리전문점 해양大반점 원종성(51) 대표다.

해양大반점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大자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大자를 붙인 것이 우리에게 어색함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아마도 24년이라는 해양반점의 역사를 우리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름에 大자를 붙인 데에는 그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이름에 大자를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0년 만에 건물을 사고 이제는 내 집에서 사업을 펼치게 됐다는 의미, 앞으로도 그 이름에 걸맞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大자에 담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大자 속에는 중국음식 하나로 20년 동안 고객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질을 지켜왔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 그리고 서울 명동에 가져다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시설로 남해의 음식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해양大반점은 우리가 ‘먹자골목’이라고 부르는 골목에 있다. 읍내 큰 사거리에서 먹자골목으로 몇 걸음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간판을 달고 있는 3층 건물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원종성 대표가 중국음식점을 시작하면서부터 품어왔던 포부의 결정체이자 20년 동안 한우물만 파왔기 때문에 안을 수 있었던 그만의 열매다. 그는 해양반점만큼은 먹자골목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이 꿈꿔왔던 것을 이뤘을 때 그는 大자를 붙이겠노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大’자를 붙인 이유

그는 삼동면 수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몇 살 안 돼 부모님이 읍 남산동으로 이주해 정착했고 해양초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고향은 남산동이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그는 남해중학교 대신 무료로 다닐 수 있었던 남성고등공민학교(현 행복한 교회)에 보내진다. 이 학교마저도 1년 만에 때려치웠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다.       

도시로 나가 중국음식점에서 요리를 익혔고 스물여섯 살 청년이 된 1987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중국집을 차렸다. 지금 화전별당 앞에 있는 훼밀리마트 건물이 그가 처음 중국음식점을 열었던 곳이다. 1년쯤 지났을 때 이 건물을 다시 짓게 됐는데 새 건물이 지어지자 음식점은 새 건물을 버릴 수 있다며 주인이 세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옮겨 간 곳이 군청 입구동우사 옆이었다. 여기에서 시작된 해양반점의 역사는 8년 만인 1996년 인근의 명동설렁탕 건물 2층으로 옮겨지면서 이름조차 ‘만리향’으로 바뀐다. 만리향이 추구했던 것은 당시 남해에는 없었던 고급형 중국요리 전문점이었다. 흔한 배달전문점에서 고객이 찾아오는 음식점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고급형 중국요리점이 되겠다는 그의 구상은 이내 찾아든 아이엠에프 여파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이엠에프가 닥치기 전에는 서로 음식 값을 내겠다고 다투던 사람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발길도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많은 돈을 들여 고용했던 요리사들의 월급과 인테리어 비용을 합쳐 1년만에 2억5천만원을 까먹게 됐다. 불운이 겹치려고 하니까 한꺼번에 닥쳤다. 그해 초 막내여동생을 시작으로 몇 개월 새 모친과 부친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일도 치러내야 했다.  

결국 7천만원을 더 들여 실내를 바꾸고 ‘청석골’이라는 민속주점으로 업종을 전환했지만 그 것 역시 그를 참담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흔히 ‘사업에 실패했다’고 말할 때 그 실패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 상황이었다. 지난 8년간 해양반점으로 마련한 밑천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가 돌아갈 곳은 역시 옛날의 해양반점밖에 없었다. 

1998년 농협남해군지부 옆에 주원빌딩이 지어지자 그는 이곳 1층 한 칸을 세 얻어 해양반점을 되살렸다. 이후 해양반점의 역사는 이곳에서 10년간 이어진다. 아이엠에프가 강요한 참담한 실패가 역설적으로는 오늘의 해양大반점을 있게 한 전환점이 됐던 것이다.

실패를 통해 그는 자신의 본업이 사람들에게 친숙한 보통의 중국음식을 빨리 배달해주는 일임을 알게 되었고 본업에 충실할 때만이 사람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만리향과 청석골로 보냈던 그 2년간은 내 가슴에 흑백사진처럼 남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다녔지만 속은 곰탕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내게 천직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고 천직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돈은 자연스럽게 벌어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이치가 제 삶의 철학이 됐습니다.”       

실패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성공이라는 개념도 그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려운 과정에 진정으로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사람은 바로 아내 박은희 씨다. 아내 박 씨는 그의 여동생이 일하는 직장의 선임자였다. 여동생이 오빠랑 연결시키고자 했으니 박 씨가 동료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쉬는 날이면 아내와 남해 바깥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것도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 중에 하나다. 아내가 일주일 간 쌓인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씻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어디를 가든 유명하다는 음식점에는 꼭 들러서 음식을 맛보고 온다. 부부는 삼남의 이름난 음식점을 다 꿰고 있을 정도다. 이런걸 보면 본업, 천직을 강조하는 음식점 사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아내 그 든든한 동반자

주원빌딩 시절인 2003년 그는 남해청실회 회장을 맡아 사회단체장으로서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해냈으며, 2005년에는 부총재까지 맡아 14년간의 청실회원으로서 대미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어 그는 새남해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사회봉사단체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는 청실회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후배들을 만나면 사회봉사단체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고 말한다. 남해자애원 아이들에게 남몰래 자장면을 선물하거나 사회봉사단체가 봉사활동을 나갈 때 빠지지 않는 자장면 봉사는 모두 그가 자원한 것이다.  

아무튼 주원빌딩시절 10년 역사는 해양반점을 지금의 먹자골목 시대로 이끌었다. 해양大반점은 보통의 중국음식점에서 느끼지 못하는 고급스러움을 갖추고 있다. 해양大반점이 남해의 음식문화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자긍심을 그는 자신 있게 말한다.     

“업을 한다는 것은 군민들과 구두약속을 한 것입니다. 언제든 해양반점에 가면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제가 군민들에게 한 구두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바로 제가 천직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  

그는 해양반점만의 맛을 아는 고객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던 간에 아내가 “지금 바쁩니다”라고 전화를 해오면 그는 즉시 달려간다. 그가 직접 요리하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4년간 해양반점을 키워주셨던 분들에게 제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은 해양반점만의 맛을 낼 수 있는 좋은 재료와 정성을 다해 조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업에 충실하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처음이자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냥 해양반점이던 때와 大자를 넣은 해양大반점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 가장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의 그의 입술은 앙다물어졌으며 눈동자에서는 광채가 발산되는 것 같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