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 욱과 헌정왕후의 슬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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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 욱과 헌정왕후의 슬픈 사랑
  • 김성철
  • 승인 2012.09.10 08:33
  • 호수 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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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12
안종(安宗) 욱(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다섯 번째 부인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이다.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아들 순(詢)이 고려의 제8왕인 현종으로 등극하자 추존왕으로 안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안종 욱은 이복형인 대종(大宗) 왕욱(王旭)의 둘째딸이자 조카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설과 사랑하여 아이를 갖게 한 죄로 경남 사천시로 유배되었다.

헌정왕후는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의 사촌누이로 네 번째 왕비였다.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십대 중반에 청상이 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헌정왕후는 시숙부인 왕욱의 집 근처 황보씨 사제(私第)에 머물게 되었다. 왕욱의 집은 개성 송악산의 왕륭사 남쪽에 있었다. 헌정왕후는 시숙부인 왕욱을 자주 찾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둘은 서서히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십대 중반의 헌정왕후는 법도상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50대의 안종 욱이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왕후는 송악산으로 나들이 가는 꿈을 꾸었다. 고려 수도인 개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곡령(鵠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왕후는 시녀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위 뒤에 숨어 일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소변이 멈추지 않고 은빛으로 반짝이며 온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왕후는 해몽을 잘하는 시녀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계시하는 꿈입니다”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과부가 아들을 낳다니,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하여라”

헌정왕후는 시녀를 꾸짖었다. 하지만 시숙부 왕욱에게 10년간 의지하며 조금씩 움직였던 마음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경종이 승하한 지 10년이 되는 991년 7월 11일. 송악산 왕륜사에서 경종의 명복을 비는 재가 끝나고 사제로 돌아오는 야심한 밤길에 안종 욱과 헌정왕후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 밤 둘은 구름 속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잦아지자 결국 헌정왕후는 임신을 하고 말았다. 태기를 느낀 왕후는 불안했다. 임금을 모셨던 몸으로 다른 남자와 정을 맺는 것도 모자라 시숙부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드러내 놓고 정을 통하고 있었지만 마음 약한 헌정왕후는 불안에 떨며 왕욱에게 안겨 울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오. 그대의 마음만 간직했어야 하는데. 아이까지 갖게 했으니 어쩌겠소. 내가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쓸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하시오. 이러다간 몸까지 상하겠소”

「고려사」후비열전과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성종 11년(992) 7월, 후(后)가 안종의 집에서 자는데 가인(家人)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크게 붙자 백관이 달려가 구하고 임금인 성종도 위문하니 가인이 왕후의 임신 사실을 고하니 안종을 유배하였다. 후가 부끄러워 울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태동이 있어 문 밖의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정왕후는 출산 직전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집안사람 또는 아내의 고발로 성종에게 발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많은 시숙부를 사랑했던 헌정왕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불륜의 굴레를 쓰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이십대 중반에 아이를 낳은 그날까지 불안에 떨었던 그녀는 슬픈 사랑의 씨앗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왕욱은 싸늘히 식어가는 연인을 얼싸안고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숙부께서 왕실의 풍기를 문란하게 했소이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사수현으로 귀양보내고자 하니 너무 섭섭게 생각하지 마시오”

7월 1일 폭염 속, 귀양길을 나서는 왕욱의 뒤에서는 갓 태어난 아들 왕순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다음호에 계속>

김 성 철(남해유배문학관 관장)

안종(安宗) 욱(郁)은 고려 태조 왕건의 다섯 번째 부인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이다.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아들 순(詢)이 고려의 제8왕인 현종으로 등극하자 추존왕으로 안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안종 욱은 이복형인 대종(大宗) 왕욱(王旭)의 둘째딸이자 조카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설과 사랑하여 아이를 갖게 한 죄로 경남 사천시로 유배되었다.

헌정왕후는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의 사촌누이로 네 번째 왕비였다.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십대 중반에 청상이 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헌정왕후는 시숙부인 왕욱의 집 근처 황보씨 사제(私第)에 머물게 되었다. 왕욱의 집은 개성 송악산의 왕륭사 남쪽에 있었다. 헌정왕후는 시숙부인 왕욱을 자주 찾았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둘은 서서히 연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십대 중반의 헌정왕후는 법도상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50대의 안종 욱이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왕후는 송악산으로 나들이 가는 꿈을 꾸었다. 고려 수도인 개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곡령(鵠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왕후는 시녀들을 물러서게 하고 바위 뒤에 숨어 일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소변이 멈추지 않고 은빛으로 반짝이며 온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왕후는 해몽을 잘하는 시녀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계시하는 꿈입니다”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과부가 아들을 낳다니,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하여라”

헌정왕후는 시녀를 꾸짖었다. 하지만 시숙부 왕욱에게 10년간 의지하며 조금씩 움직였던 마음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경종이 승하한 지 10년이 되는 991년 7월 11일. 송악산 왕륜사에서 경종의 명복을 비는 재가 끝나고 사제로 돌아오는 야심한 밤길에 안종 욱과 헌정왕후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날 밤 둘은 구름 속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잦아지자 결국 헌정왕후는 임신을 하고 말았다. 태기를 느낀 왕후는 불안했다. 임금을 모셨던 몸으로 다른 남자와 정을 맺는 것도 모자라 시숙부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드러내 놓고 정을 통하고 있었지만 마음 약한 헌정왕후는 불안에 떨며 왕욱에게 안겨 울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아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오. 그대의 마음만 간직했어야 하는데. 아이까지 갖게 했으니 어쩌겠소. 내가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쓸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하시오. 이러다간 몸까지 상하겠소”

「고려사」후비열전과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성종 11년(992) 7월, 후(后)가 안종의 집에서 자는데 가인(家人)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이 크게 붙자 백관이 달려가 구하고 임금인 성종도 위문하니 가인이 왕후의 임신 사실을 고하니 안종을 유배하였다. 후가 부끄러워 울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태동이 있어 문 밖의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을 낳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정왕후는 출산 직전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집안사람 또는 아내의 고발로 성종에게 발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많은 시숙부를 사랑했던 헌정왕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불륜의 굴레를 쓰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이십대 중반에 아이를 낳은 그날까지 불안에 떨었던 그녀는 슬픈 사랑의 씨앗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이다. 왕욱은 싸늘히 식어가는 연인을 얼싸안고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숙부께서 왕실의 풍기를 문란하게 했소이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사수현으로 귀양보내고자 하니 너무 섭섭게 생각하지 마시오”

7월 1일 폭염 속, 귀양길을 나서는 왕욱의 뒤에서는 갓 태어난 아들 왕순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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