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남조 후손 전국에 4천여 호 이를 정도로 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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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조 후손 전국에 4천여 호 이를 정도로 번성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4.04 13:42
  • 호수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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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성씨 발자취를 찾아서 4 밀양박씨 현감공파 문중

군내에 효자ㆍ열녀비, 송덕비, 공적비 등 많아 조상 경배심 더욱 높아

▲ 현감공파 성관 할아버지가 덕을 베푼 것을 고맙게 여긴 걸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송덕비.
박(朴) 성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부터 비롯된다. 오늘날 박 성이 만파일원(萬波一源)의 성손임을 자랑하고 있는 까닭도 신라 시조왕의 유일한 혈손이기 때문이다. 입남조 현감공의 다섯파 자손들의 번성도 대단해 재남ㆍ재외 호수가 4천여 호를 헤아린다고 한다.

2000년 기준 남해군지의 통계에 따르면 박 씨는 2773가구에 7099명이 남해전역에 살고 있다. 이 중 밀양박씨가 2400여 가구 정도이고 죽산박씨가 300가구 정도이며 소수의 고령, 함안, 상주 박씨가 남해에 거주하고 있다.

밀양박씨는 시조왕의 29세손인 경명왕의 팔대군과 국사공 9왕자 중 30세손인 맏아들 언침께서 지금의 밀양에서 살아오셨기에 그 분을 관조(貫組)로 모시고 있다.

밀양박씨 현감공파 입남조인 환(桓) 할아버지는 12중조 중 46세손 규정공 현(鉉) 할아버지에 이어 파조이신 51세손 절도사공 대손(大孫)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환(桓) 할아버지는 지금부터 500년 전 조선 중기 연산군 때 부인과 1녀 5남을 거느리고 진주에서 남해 서면 대정마을 박무덤골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고 밀양박씨현감공파세보에 기록돼 있다.

입남조 환(桓) 할아버지는 성균진사 운산, 문의현감을 거쳐 1501년 진주 교수관 재임시 무오사화가 일어난 후 교수관직을 버리고 남해로 피신해 은거하면서 사신 것으로 전해진다.

▲ 박종업 회장이 손수 만든 세손표를 보며 문중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박 회장은 보름가량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A4용지 15장 분량의 세손표를 만들었다고 한다.
입남조 할아버지의 다섯 아드님 성간, 성화, 성주, 성근, 성의의 후손들은 설천 고사, 서면 대정, 작장마을 등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자녀교육에 매진해 현감공파 문중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 중 국회의원과 시의원, 군의원, 관직과 교육계, 학계 등 다양한 분야의 요직을 거치거나 현직에 있는 후손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입남조 환 할아버지의 묘소는 남해읍 봉성(새방골)마을 조방정 팔부능선인 일산봉아래 도장골 정좌원에 있으며 매년 음력 8월 25일에 뜻있는 자손들이 모여 성묘를 지내고 있다. 현감공파 후손들은 읍 남산자락에 1971년 준공한 청풍재 재실에서 음력 10월 10일 시향을 모시고 이후 소파별 재실과 묘소에서 시향을 모시고 있다. 또한 소파별로는 산재해 있는 선영들의 묘소를 납골당과 평장묘지 조성지로 옮겨 관리하며 숭조정신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현감공파 종가인 설천면 고사마을 박대곤 씨 집엔 교지와 다양한 서책, 유품들이 잘 보존돼 조상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이 문중 후손들의 자랑중 하나다.

아울러 집성촌인 고사마을 동구 밖에 효자ㆍ열녀비와 서면 대정마을 큰길 입구에 효자문이 세워져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아울러 지역사회에 봉사한 기념비와 식객들을 정중히 대접하며 덕을 베풀어 그 은혜를 입은 걸인들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송덕비까지 남아 있어 후손들의 조상들에 대한 경배심은 세월이 흘러도 빛을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문중 소개를 맡아 준 박종업 밀양박씨남해대종회 회장은 “농촌의 급속한 노령화로 신조어인 ‘한계부락’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조상님들을 모시는 일에 더 많은 후손들이 관심을 함께 가져주었으며 하는 아쉬움에 대종회에서는 이번 저런 방안을 고민중”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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