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남조 한량, 500여년전 무오사화 피해 서호마을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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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조 한량, 500여년전 무오사화 피해 서호마을에 정착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5.30 10:14
  • 호수 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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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성씨 발자취를 찾아서 8 경주김씨 수은공파 서호문중

경주김씨 서호문중 재각 호산사
4세손 노량 충렬사 건립, 6세손 삼고초려 끝에 증축 이끌어 내
후손들 ‘금요회’ 만들어 ‘숭고상문’ 마음 나누며 우애 꽃피워

경주김씨의 입남조는 시조 알지 대보공(大輔公)의 49세손이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수은공 충한(沖漢)의 6세손인 휘 한량(漢良)이시다.

한량께서는 조선 문화가 꽃피는 성종 15년(1484년)에 출생해 기자전 참봉을 지내고 통정대부 벼슬에 오르기도 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피해 1501년 서면 서호마을에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한량께서는 당시 진사를 지낸 남해 밀양박씨의 입남조인 환(桓) 할아버지의 여식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가문 내력을 따지고 보면 경주김씨와 밀양박씨집안은 서로 사돈 간이 되는 셈이다.

두 분은 슬하에 두상과 웅상, 두 아들을 두고 돌아가셨고 묘소는 쌍분으로 대정리 남산평지에 모셔졌다고 한다.

경주김씨와 노량 충렬사

서호~서상 도로가에 세워져 있는 김부 달성 서씨 효열비
경주김씨 서호문중은 노량충렬사와 인연이 깊다. 한량 할아버지의 4세손인 여빈 할아버지는 노량 충렬사를 창건한 분이고 여빈의 손자인 경이(慶履) 할아버지는 충렬사 증축에 크게 이바지 한 분이기 때문이다. 

여빈께서 당시 선비인 고승후와 힘을 모아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지 30년이 지난 1628년 지금의 충렬사 자리에 한 칸 짜리 초옥을 지은 것이 충렬사의 모태다. 그 후 무속잡배의 출입으로 충렬사가 쇠락해지고 주위가 산만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여빈의 손자 경이께서 조정에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1721년 충렬사가 증축됐다.

남해충렬사측에서는 2011년 충렬사 밑에 영세불망비를 세우고 경주김씨 가문 사람들의 공덕을 후손만대에 전하고 있다.

전국에 600세대 살고 있어

경주김씨 서호문중의 자손이 번창하고 군내 곳곳으로 뻗쳐 나간 것은 입남조의 6세손인 경이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한다. 경이 할아버지 형제는 모두 네 분이셨는데 남해 각지로 퍼져 나가 그 후손들이 지금 서면 서호ㆍ대정, 이동 초음, 설천 금음, 삼동 삼화뿐만 아니라 하동 박달리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후손의 수는 1995년 재각 호산사(湖山祠)를 건립할 당시 남해와 하동에 300세대 가량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으나, 지금은 남해와 하동은 줄어들고 전국에 600세대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긍지는 사적비각과 재각, 효열비 등을 통해 느낄 수 있다. 후손들은 서로 간에 힘을 모아 1970년 서호마을 입구에 입남조의 사적비각 취송정(翠松亭)을 세웠으며, 1995년 서호마을 뒤편에 재각 호산사를 건립했다. 이곳에서는 음력 10월 14일 시향과 문중 회의가 열리고 있다. 또한 서호마을에서 서상마을로 가는 도로가에 김씨 집안 부인인 달성 서씨의 효열비 비각이 견치석으로 조성돼 있기도 하다.

가문을 빛낸 인물은

문중 소개를 해 준 김도진 경주김씨 종친회장과 입남조 사적비각 취송정.
서호문중의 후손들은 행정과 교육계, 학계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 행정 분야에서는 김태현 부군수, 김성호 기획감사실장, 김종선 농정산림과장, 김종주 재경부 서기관, 김달수 하동군 양보면장, 교육계에서는 김홍안 교장, 김정오 교장, 김재평 교장, 김정숙 창원대학교 교수, 학계에서는 김회태 농학박사, 김재성 공학박사, 김동욱 경제학박사, 김정진 법학박사 등이 가문을 빛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아울러 법조계의 김일출 법무사, 김재헌 국제변호사를 비롯 김극민 중령, 김종성 대령, 김정호 국제축구심판, 김영호 기술사, 김수평 기술사, 김동원 회계사도 문중의 자랑으로 꼽히고 있는 인물이다.(전현직 무관)

또한 이 문중에서 서면장을 6명이나 배출한 것이 특이한 점으로 꼽을 수 있다. 김태빈(2대), 김봉조(4대), 김정옥(9대), 김정철(13·16대), 김성호(24대), 김종선(27대) 서면장이 주인공이다.

아울러 경주김씨 후손들은 이동 고모마을에 사는 종원ㆍ석원 종원의 주선으로 대정리 남산평지에 납골평장묘지를 조성해 군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조의 묘소를 한 곳으로 모았으며, 이동 초음 후손들은 350기를 안치할 수 있는 큰 납골묘를 조성하기도 했다.

경주김씨종친회 김도진 회장인 “우리 경주김씨는 종원간 우애는 남달리 두터운데 그 비결은 ‘금요회’에 있다. 우리들은 연령대별로 일금회(70대가 중심), 이금회(60대), 삼금회(50대), 사금회(40대)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남을 통해 조상을 숭배하고 종원간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숭조상문의 마음을 키워오고 있다”고 자랑했다.

아울러 김 회장은 “음력 10월 14일 시제향사에 많은 젊은 종원들이 참석해 주시길 당부드리고, 올해 10월말 발간 예정인 수은공파 대동족보 편찬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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