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남해에 머문 내금장 유기(有起)할아버지가 입남조
상태바
임진왜란 후 남해에 머문 내금장 유기(有起)할아버지가 입남조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7.11 10:11
  • 호수 3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남성씨 발자취를 찾아서 12 청주한씨 장성공파 남해문중

▲ 청주한씨 후손들이 입남조 묘소에서 시향을 모신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남면 죽전ㆍ이동 금평ㆍ설천 덕신 등지에 집성촌 이루고 살아  … 대외적으로 훌륭한 인물 많이 배출해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姓氏)로 알려져 왔다.

여러 고서와 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지금의 강원도 원주)에 들어가서 북원선우씨(鮮于氏)가 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舊制)에 따른 상당한씨(上黨韓氏)가 되고, 우성(友誠)은 평강(강원도 평강)으로 들어가 덕양기씨(德陽奇氏)가 됐다. 따라서 한씨와 선우씨, 기씨는 한 집안이며 모두 기자의 후예이다.
                                                           
파조에 대해

장성공파(章成公派) 파조 휘 효원(效元 1468~1534)은 시조 휘 난(蘭)의 16세손으로 시정공(侍正公) 증(曾)의 아들이고 찬성공(贊成公) 장손의 손자이다.

한효원은 1534년(중종29년) 11월 장순손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으며, 집안 또한 고려 때부터 대대로 벼슬이 이어진 명문 호족이다.

장성공 한효원은 1489년에 사마시를 거쳐 같은 해 문과에 올라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홍문관박사 등 초임관직으로는 상당히 무게 있는 직위를 누린 뒤, 아버지가 사망하니 치상을 위해 2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상례에 전념했다.

치상을 마치고 다시 관직에 나온 한효원은 황해도문폐 어사, 홍문관직제학ㆍ부제학ㆍ동부승지를 역임하고 대사헌에 올라 관기를 다스렸다. 이어 도승지에 올라 왕을 보필하고 병조참판이 돼 명나라사신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임금으로부터 “재해가 심한 영남지방에 나가 경상도백성들을 구호하는데 특히 힘을 쓰라”는 어명을 받고 경상도관찰사가 됐다. 이처럼 문제가 있는 지방에는 한효원이 나가 다스리기를 자주했는데, 다시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척박한 변방의 민생을 살폈다.

가는 곳마다 업적을 남긴 한효원은 좌참찬ㆍ우의정ㆍ좌의정을 거쳐 67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왕세자를 훈육하는 세자사를 겸했다.

그러나 영의정에 오른 지 한 달 열흘만인 같은 해 12월, 몸에 병을 얻어 숨지고 말았다. 임금 중종은 그에게 장성공이라 시호를 내렸다.

▲ 지난 7일 한호식 종친회 부회장, 한재성 종친회 회장, 한봉기 부회장, 한일균 전 총무 등 종친회 관계자들이 제각 묘향정을 둘러봤다.
입남조에 대해

청주한씨 장성공파 입남조 휘 유기(有起)는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으로 판관공(判官公) 척의 아들이며, 영의정을 지낸 장성공 효원의 현손(玄孫)이며 찬성공 장손의 6대손이다.

공은 중종 36년(1541)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무예를 좋아하더니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거장수(義擧將帥)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내금장(內禁將, 조선때 임금의 좌우에서 호위를 맡아보던 군관)으로 출정해 선조 31년(1598) 11월에 종전을 맞았다. 특히, 왜적 최후의 도망자인 적장 소서행장이 남해 노량진을 빠져 도주할 때 공이 큰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공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동면 석평리에서 왜적으로부터 남해도를 지키면서 유유자적 망향의 정을 그리며 향학에 힘쓰고 난세의 한을 자위하다 선조 41년(1608) 68세로 졸하였다. 묘소는 고현면 도산리 가청산에 모셔졌으며, 후손들은 비갈(碑碣)과 묘 아래쪽에 모향정을 세워 선조의 충성심을 높이 기리고 있다.

제각과 시제

입남조의 배위(配位)는 정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참봉 상필(尙弼)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정부인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비갈이 있는데 오랜 세월로 마멸돼 공묘의 아래에 있는 배양위묘(配兩位墓)앞에 세우고 묘비는 1976년 윤8월에 세웠다.

또한 1993년 4월 공의 정부인 문화유씨와 남원양씨의 묘가 각각 공묘(公墓)의 하조(下兆)에 있는데 공묘에 있던 묘갈(墓碣)을 1976년 윤8월 개수비(改竪碑)와 함께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후손들은 음력 10월 6일 이곳에 모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종친회와 가문 빛낸 후손들

2010년 발간한 종친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남해에는 227세대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남해읍이 51세대로 가장 많이 살고 있으며, 남면 죽전ㆍ홍현ㆍ운암에 45세대, 이동면 용소ㆍ화계ㆍ금평ㆍ신전ㆍ원천에 45세대, 그 외 서면 동정ㆍ염해ㆍ유포ㆍ현촌, 설천면 덕신, 상주면 상주, 미조면 미조, 삼동면 물건, 창선면 가인 등지에 널리 분포돼 있다. 또한 하동군 진교면 양포ㆍ전도뿐만 아니라 진주와 부산, 마산, 고성, 통영, 사천 등지에도 살고 있다고 한다.

현재 군종친회는 한재성(33세손) 회장이 이끌고 있다. 한 회장은 2009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한일균 전 총무와 함께 종친회 회원록을 발간했으며, 현재 납골평장공동묘역 조성에 힘 써오고 있다. 종친회 임원진으로는 5년 넘게 새마을운동지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군의회의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호식(33세)부회장과 한봉기(33세) 부회장, 한진균 총무(33세)가 있다.

또한 한태성, 한희목, 고(故)한재호 전임회장과 한순태, 한창옥, 한호림, 고(故)한기억, 한일균 씨 등이 그동안 총무를 맡아 종친회 발전에 노력해왔다.

사회적으로는 한옥두(33세) 동아유리 대표이자 부산종친회장, 한종옥(34세) 동성제분 대표이자 부산종친회부회장, 한연표 부산지법 부장판사(33세), 한상훈(35세) 프로바둑기사, 한희동(35세)사법고시 합격자, 한인규(33세) 서면장, 한일균(32세) 전 미조레이더기지장, 한옥문(35세) 양산시의회의원, 한세일(35세) 교장, 한윤옥(36세) 검사 등이 있다.

또한 청주한씨 집안에서는 여성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수자ㆍ한정숙 전 남해군새마을부녀회 회장과 한정녀 현 회장 등이다. 한수자 회장은 오랫동안 새마을문고 회장을 맡아 활성화에 힘쓰기도 했다. <이상 무순/전현직 무관>

작고하신 분 중에서 군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분은 의관(議官-조선 고종 때의 중추원의 한 벼슬)을 지내고 당시 남해에서 제일가는 천석꾼으로 명성이 높았던 한우성(29세), 재건국민운동 남해군초대지부장이자 남해에 최초로 인쇄소를 운영했던 한규식(31세), 대구의대를 졸업하고 남해에 최초로 의원을 연 한남수(31세), 남해문화원장과 2대 종친회장을 역임한 한석현(33세) 씨 등이 있다. 

현재 청주한씨남해종친회에서는 납골평장묘역 조성을 추진 중이며, 중앙종친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인터넷 한글족보에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한재성 종친회장은 “오로지 숭조정신을 바탕으로 화합해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고향과 객지에 계시는 일가님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며 종친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연락처 한재성 회장 m.010-3 050-9197 / 한진균 총무 m.010 -8503-373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