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남조 1600년대 후반 여수에서 장항으로 건너와 뿌리내려
상태바
입남조 1600년대 후반 여수에서 장항으로 건너와 뿌리내려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7.18 10:58
  • 호수 36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남성씨 발자취를 찾아서 13 밀양박씨 규정공 후 전한공파(典翰公波) 장항문중

장항·입현·무림·석교 등에 문중 형성

▲ 남해에 있는 문중재각
중시조 규정공은

공의 휘는 현(鉉)으로 밀양인이다. 신라 시조왕의 45세손이며, 관조 밀성대군(密城大君)의 16세손이다. 1253년 고려국 태사(太師) 문정공의 아들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사헌부 규정(糾正)에 오르고 무열(武烈) 시호를 받아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波) 중조가 되었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학문에 힘써 도학(道學)과 문장이 뛰어나 그 이름을 떨치고 향년 87세인 1340년 졸(卒)하였다,

1367년(공민왕16)에 대사성 문정공(文正公)인 이색(李穡)과 대사간 박상충(朴尙忠)이 상소하기를 “박 현은 청백리로 인의를 베풀고 충효의 사상을 널리 보급한 사람으로 한 마디로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調宗)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하오니 규정(糾正)박현은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공의 높고 밝은 큰 덕과 가르침으로 말하면 그 업적이 문성공(文成公) 안유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忠)과 같이 높고 어지니 이들과 함께 숭의전(崇義殿)과 공자묘(公子廟)에 배향(配享)하여 제사하게 하소서”라 하였다. 고의 배위는 동래정씨로 밀직함의 따님이다. 공의 묘(墓)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 박능동 두메산 아래에 있다.

파조에 대해

공의 휘는 인원(仁元)이요, 자는 덕초(德初)이니 1514년(중종9)에 오정공(梧亭公) 난(蘭) 맏아들로 태어났다. 초배는 파평윤씨로 호군(護軍) 윤현손(尹賢孫)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평산신씨 평원군(平原君)의 딸이다. 공은 1552년(명종7) 4월 병과에 급제하고, 1562년(명종17)에 세자 시강원(時講院)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1563년(명종18) 성균관 사예(司藝)와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1570년(선조3)에 홍문관 전한(典翰) 종부시 정(正)에 이르렀다.

1577년(선조10년) 10월 24일에 하세하니 묘는 고양시 두웅촌 박재궁 선영하 술좌(戌坐)에 배위와 합장으로 모시었다. 이 분이 바로 전한공파(典翰公波)의 파조(波祖)이시다.

▲ 입남조 신형할아버지의 묘소
입남조 신형(信衡)에 대해

입남조 신형(信衡)은 파조인 인원 할아버지의 현손이며,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 맞싸워 빛나는 공훈을 세우신 성무(成武)의 손자이시다. 지금도 전남 벌교 에는 성무(成武)을 기리는 사당이 있으며, 이 사당은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신형은 충성과 효도의 도리를 두루 다하며 선무이능공신(宣武二能功臣)에 책봉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와 이조판서 (吏曹判書)의 벼슬에 차례로 증직(贈職-국가에 공에 있는 사람에게 사후에 품계나 관직을 추증하는 것)되었다.

공의 아버지는 견립이시고 1637년 4남중 셋째로 태어나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에 살다 부모형제를 떠나 바다건너 남해섬으로 들어와서 서면 장항리에 뿌리를 내렸다. 배위 안동권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동백(東栢)의 직계후손은 장항마을을 중심으로 대대로 살고 있고, 차남 동남(東南)의 직계후손은 남해읍 입현마을과 이동면 무림리, 남면 석교리 등에서 문중을 형성하고 있다.

공과 배위의 묘는 장항 가장골 같은 곳에 있고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후손들이 1992년 공의 묘 옆에 재실 황용문(煌龍問)을 건립해 음력 10월15일 앞 일요일 각향 각처에서 80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1991년 장사등에관한법률 개정과 산짐승들의 묘지 훼손때문에 문중회의를 소집해 소파별로  조상들을 납골묘로 모시기로 결정해 서면 장항리에 납골묘 3기, 평장묘 1기, 남면 덕월리 납골묘1기를 조성하여 성묘를 지내고 있다,

▲ 밀양박씨 전한공파 장항문중 재실과 문중사람들
가문을 빛낸 사람들

밀양박씨 전한공파 장항 문중의 인물로는 박동백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박시도 통정대부(通政大夫), 박맹운 이조판서(吏曹判書), 박행복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박춘욱 종2품가선대부, 박춘영 종2품 가선대부, 박일용 정3품 통정대부, 박순준 정3품 통정대부를 증직했다.

특히 밀성대군 38세 박진평은 1928년 선소항 호안도로 건설, 남해시장 이전 때와 남해와 여수간 순항선 경전호를 설치하는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으며, 남해 충렬사를 중건하고 경주 숭덕전 중수비를 기증하신 분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인물로는 박희오 화전 농악을 보급해 남해문화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남화전농악 기능 보유자, 국제변호사 박영희, 법무관 박덕상, 공학박사 박성찬, 이학박사 박재영, 부산시 교육청장학사 박귀영, 경남교육청장학사 박진우, 동주대 교수 박기태, 학원장 박춘희, 전 국가대표 사격선수 박남규, 박길영 전 종친회장, 박인길 전 서진수산대표, 박정구 영진화이테크대표, 박수평 대일테크 대표, 박인구 성호테크 대표, 박구일 구일가든 대표, 박재석 보료대표, 박덕헌 비게이씨 대표, 박기재 현대중공업 부장, 박준원 철도시설공단부장, 마을 이장 박기정 등 종친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가문을 빛낸 종중들이 이루어 말할 수 없이 많다.

▲ 박정구 문중 종친회장
특히 후손들은 규정공파 대동보에 입남조 신형(信衡)할아버지가 3남인데 대동보에는 4남으로 잘못 등재 되어있는 것을 2012년도 규정공파 대동보 출판 때 바로잡고, 누락된 후손 1300여명을 대동보에 등록해 원본을 재실에 비치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후손들끼리는 나이가 어려도 서로 예우하며 존경의 예를 갖추는 등 역대 조상의 기품을 이어받아 예절을 중시 여기는 명문중의 명문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자료제공 = 박동규 재부박씨종친회청년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