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인생의 첫날, 남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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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의 첫날, 남해가 좋다
  • 이현숙
  • 승인 2014.01.16 13:16
  • 호수 3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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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창선면)

 언젠가부터 남편은 서울생활에 염증이 난다며 하루속히 교단에서 명퇴하여 흙냄새를 맡고 싶다는 말을 되뇌었다. `인생 뭐 별거 있다고` 더 이상 시골행을 미룰 수 없었다. 기후가 온화하고 중·고교 도보 통학이 가능한 지역을 물색하기 시작한 지 반 년  만에 우리 가족의 새로운 둥지로 남해가 낙점되었다.

 생뚱맞고도 무모한 도전을 염려하는 일가친지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이곳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간의 막연한 불안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타임 슬립을 하여 1970년대 서울의 어느 뒷골목을 표류하는 듯 한 무채색 풍경 앞에 일단 무장해제 되었다. 소 궁둥짝만한 면 소재지 작은 마을에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것에 놀랐고, 도시에서는 은퇴한 줄 알았던 밤하늘의 별들이 이곳에선 여직 현역임에 반가웠다. 섬치고는 의외로 너른 논밭과 봉긋봉긋 돋아난 산자락에 기대어 올망졸망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과의 조화로움에 왠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동대만 방죽에서는 삼천포대교가 손에 닿을 듯한데,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에 비친 산 그림자는 한 폭의 산수화다. 창선의 히말라야, `대방산` 정상에 오르면 저만치 푸른 융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바다에 숨이 턱 막힌다. 햇살 가득 부서지는 초록 숲에 취하면 세상 시름이야 절로 잊힌다. 창선사람들의 젖줄인 옥천 저수지는 창선의 너른 들녘 실핏줄까지 옹골지게 물을 흘려보낸다. 그러니 한가득 물을 담은 저수지는 흰쌀밥 수북한 가마솥단지인 양,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붉은 동백은 겨울철 눈이 귀한 이 고장에 온기를 더하고, 매화꽃은 겨울바람이 벼려 낸 향기를 달고서 찾아오는 봄의 첫손님이다. 치자나무 꽃향기가 후각을 자극하는 여름에는 윗마을 풀숲에서 반딧불이가 붕붕대며 날아다니는 몽환적인 풍경에 빠져 달빛 아래 신선놀음도 즐긴다. 가을 역시나 천리향의 고혹적인 향기에 이어 비파나무 꽃향기까지 온 동네를 휘감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겨울잠에 빠져들지 못한 마늘밭은 무심히 제 풋풋함을 뽐내는데, 바닷바람 맞고 농부 발자국 소리 들으면서 땅 속에서는 알이 실하게 영글어 갈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 살아도 흙의 고마움은 아는 도시사람들 식탁에 이 고장 마늘이 자주 오르기를 바란다.

 그건 그렇고 평생 마늘밭과 씨름하느라 땅과 가까워진 할마씨들 허리를 보면 늘 가슴이 짠하다. 이곳 여인들의 한숨이 대방산 짙은 그늘이 되고, 그녀들의 눈물이 동대만 짭쪼롬한 바닷물이 된 사연을 그저 알 것도 같다. 엊그제도 뉘집 어르신이 세상을 버렸는지 혼백을 달래려는 듯 동네에 울려 퍼지는 장송곡 슬픈 가락을 들으며 가슴이 많이 시렸다.

 그간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서 우리 가족의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군살이라곤 모르던 인성이 어매가 이삼 년 새 10kg이나 훅 찐 것은 동네 어르신들이 챙겨 주신 제삿밥 덕분이지 싶다. 반대로 남편은 작년 새로 밭을 장만하고 아이처럼 좋아하더니 평생 처음 하는 중노동에 10kg가 쏙 빠졌다. 주변의 촉망 속에서 성장하던 아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인생2막 프로그램에 묻혀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어 내며 사춘기를 퍽 앓았었다.

 다행스럽게도 중·고교 내내 군민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향토장학금을 받으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작년 대학에 진학해서까지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하사받으니, 왠지 남해살이를 시작하고 빚만 잔뜩 짊어진 기분이다.

 얼마 전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녀석의 첫마디가 "거참, 얼큰한 물메기탕이랑 회 한 접시가 얼마나 먹고 싶던지"라니, 우와! 남해 사람이 다 됐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며 포기한 것도 잃은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운 대자연의 울타리 안에서 낯선 이방인을 보듬어 준 이웃들과 더불어, 새와 벌레와 나무와 하나 되어 살아가는 나날의 보람은 모든 허전함을 상쇄시켜 버린다. 그때 내 건강이 갑작스레 무너진 것도 남해와 인연을 맺는 데 한몫한 듯싶어, 세상에 고맙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남은 인생의 첫날인 오늘 하루가 바람처럼 휑하니 지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심드렁해지거든 우리처럼 보따리를 싸서 어디로든 훌쩍 떠나보라고 도시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남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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