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용문사, 괘불탱화 서포 수륙대재와 관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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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용문사, 괘불탱화 서포 수륙대재와 관계있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14.10.21 11:32
  • 호수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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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대재 관련성 및 수국사금패의 진실-

한국유배문화연구소장
 오는 11월 18일(음, 윤9월 26일) 남해 용문사(주지 지각)에서 대웅전 보물 승격기원 및 괘불탱화(보물 제1446호) 점안식과 영가 천도재를 봉행한다고 한다.

 필자는 괘불탱화 점안식을 앞두고 서포선생의 영혼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 설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문사 괘불탱화는 서포 김만중선생 사후 수륙대재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용문사 서포수륙대재를 무형문화유산으로 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창의성의 원천으로서, 문화콘텐츠로 유배문화의 원형과 문화적 요소를 발굴하자는 것이다.

▲ 수국사금패 앞면, 뒷면
 용문사는 남해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대표적 사찰중의 하나이다. 아직 용문사의 역사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고문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가지 구전되고 있는 자료를 보면, 조선 숙종 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번` 그리고 룗수국사금패룘 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해냈으며 그때 사용했던 삼혈포가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와 같은 근거로 용문사가 조선 숙종 때에 `수국사`로 지정되었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용문사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숙종 때에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했다는 직접적인 자료도 발견하지 못했다.

▲ 용문사 괘불탱화
 숙종조에 서포 김만중의 적소가 용문산 부근에 있었으며, 서포 김만중의 칠언율시 룗남해적사유고목죽림유감우심작시(南海謫所有古木竹林有感于心作詩)룘와 소설 룗구운몽룘 작품에는 용문산이 등장하고 있으며, 용문사 소장 룗수국사금패룘는 서포 김만중 사후 수륙재를 봉행하라는 포고문으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룗수국사금패룘의 뒷면에 서결된 익릉관(翼陵官)에 주목해야 한다. 익릉은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의 능이며, 익릉관은 익릉을 관리하는 관리자를 말함이다. 서포 김만중은 용문사 부근 적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중요한 역할은 그가 직언으로 3차 유배지 남해 적소에서 억울하게 죽은 김만중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용문사는 서포수륙대재를 봉행했던 사찰임을 유추할 수 있다.

 수륙대재는 아귀에게 시은을 베푼다는 시아귀회(施餓鬼會)의 수행과 영혼 천도의례가 결합되어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고 행복을 기원하는 불교의례이다. 아귀마저도 구제하듯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고 공양하자는 사상이 중심이다. 역사교육 현장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만큼 그 가치를 인정해 남해 용문사 수륙대재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되어져야 할 것이다. 글로벌한 특성이 있고 왕실차원의 행사였던 용문사의 수륙대재를 단순한 종교의식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문화적 기억은 풍부한 자료축적을 통해 충실해진다. 이제는 여러 매체에 잘못 소개되고 있는 용문사의 역사를 보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새 자료 발굴로 누락되었거나 오류가 다수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숙종조에 왕실에서 하사 받은 유물들은 서포수륙재를 봉행했다는 장소성의 의미를 드높이고 있다. 용문사 탐방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풀이한 소책자를 비치하거나 유물을 안전하게 공개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그 주변에 해설코너를 별도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용문사 입구 대형주차장 상단 소재 `서포문학공원`은 서포선생의 입석상과 시비(詩碑) 주변 환경을 정비하여 서포정신의 참뜻을 되새기도록 했으면 한다. 하지만 `서포문학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없어 호구산 등산객과 용문사 탐방객들이 혹여 지척에서 발걸음을 되돌린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때때로 정사가 아닌 야사가 정사의 기록보다도 더 정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유배지 적소생활은 정사로 기록될 수 없었기 때문에 문장가의 오판으로 인한 역사가 왜곡되어 사실인 것처럼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사실의 기록은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용문사의 역사가 서포 김만중의 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과 수륙재를 봉행했던 사찰로 입증할만한 유물인 룗수국사금패룘와 불구(佛具) 그리고 괘불탱화(보물 제1446호)의 진실이 선명하게 밝혀져 서포수륙대재가 재현될 수 있다면, 이는 서포 김만중의 위상을 높이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현재 행정당국에서는 역점사업으로 조성하고 있는 `노도 문학의 섬`과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서포 김만중의 본거지 남해 용문사`, `룗구운몽의 창작지 남해룘`, `서포 김만중 사후 수륙대재 봉행`, `전국 규모의 서포 추모제 봉행`, `전국 규모의 서포문화제` 개최라는 큰 그림을 그려볼 때가 되었다. 남해 용문사는 서포 김만중의 대표적 이미지 장소이다. 충·효·문학의 콘텐츠를 집약한 서포 김만중과 관련된 유물 전시 공간 확보는 유배문화관광의 본거지로서 남해의 미래 경쟁력을 선점하는 길이다. 이는 남해유배문화의 정체성 지수를 높이는 인문학의 자산으로서 널리 공유해야할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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