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년 만에 등자룡 장군의 은덕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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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년 만에 등자룡 장군의 은덕을 기억하다
  • 연곡 종호
  • 승인 2015.02.11 22:30
  • 호수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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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방사에 사당을 짓고 두 분을 모시고자 한다. 이것은 화방사가 남해충렬사의 수호사찰로, 충무공의의 원찰로 자기 사명을 되찾는 첫발이 될 것이다. 충무공 순국공원과 등자룡 장군 기념관, 충렬사와 화방사는 뭔가 궁합이 맞지 않는가? 여기에 화방사가 힘을 보태어 추진해온 고려대장경 판각지 사업까지 염두에 둔다면 말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 이만한 역사적 스토리와 문화적 의미라면 우리 남해 전체를 살리는 하나의 대책이 될 거라고 본다.

박군수, 두시진의 만남은 무슨 사연일까?

▲ 연곡 종호
    화방사 주지
 "두시진이 생긴 이후 최초의 한국 공식방문단이다, 선조(등자룡)께서 돌아가신 지 416년 만에 조상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찾아준 박영일 군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남해군에서 가져온 (관음포) 성수(聖水)는 등 씨 가문의 가보로 영원히 보존해 나가겠다"

 두시진이 무슨 말일까? 약 4시간을 뜻하는 옛말이라 생각하면 실수다. 중국의 지명이다. 장시성(강서성), 이춘시(한국어: 의춘), 펑청시(한국어: 풍성시)에 포함된 20개 `진` 중의 하나가 `두시진`이다.

 의춘시는 온천도시로 유명하다. 물의 온도가 무려 78도로 시내에 온천물이 나와  그곳에서 발을 담그는 사람이 많다. 수강의 야경도 아름답다. 풍성시는 의춘의 현급 시다. 시내에 자룡로, 자룡화원, 자룡진료소 등 자룡이란 이름이 많다. 풍성시의 두시진이란 곳을 가면 중국 장군의 커다란 동상을 만난다.

 박영일 군수가 두시진에 가서 어떤 이의 후손을 만난 건데, 도대체 박군수가 416년 만에 은덕을 잊지 않고 찾은 이는 누굴까? 이 직계후손의 이름은 등국운 씨고 그의 조상은 바로 등자룡 장군이다. 등 장군이 누군지는 묘소를 참배하고 박 군수가 한 말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기 위해 400여 년 전 등자룡 장군이 원정 온 그 길을 거슬러 남해군민의 고마운 뜻을 전하기 위해 장군의 고향인 등가촌을 찾아왔다. … 지금에야 이곳을 찾게 된 것에 사죄드린다. … 등자룡 장군이 목숨을 바쳐 지킨 신의를 교훈삼아 양 시군이 서로 화합하고 교류해 번영을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자"
 
시진핑 주석이 등자룡과 진린을 말하다 

등자룡(登子龍)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장수다. 그런데 노량과 관음포를 끼고 사는 우리 남해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설다. 등 장군이 알려지게 된 구체적인 배경이 있다. 지난 해 7월 4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서울대 특강에서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환난상조(患難相助)의 차원에서 양국의 군민이 함께 싸웠습니다. 이때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둘 다 전사했습니다. 또 명나라 군 통수인 진린의 후예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시 주석의 말처럼 등자룡과 진린(陳璘)은 이순신 장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였다. 진린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파병군의 수군도독이었다. 1598년(선조 31년) 1월 절강성 소속의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주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명군을 환대했고 진린은 선조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 장군을 칭찬했다.

 "통제사(이순신 장군)는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를 지녔고,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이 있습니다. 역시 통제사는 임금의 주석(柱石)이 될 만한 신하야. 옛날의 명장인들 어찌 이보다 나을까"(<일월록>) `주석지신(柱石之臣)`은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신하`를 뜻한다.

 충무공과 피를 나눈 전우가 된 진린은 이후 조선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 진린 도독이 죽고(1607년), 명말 청초의 어수선한 정세를 맞이한 후손들이 조선 땅에 정착한 것이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진린 도독의 체취가 묻어있는 고금도(지금 완도군)이었다. 이후 진린 도독의 후예는 `광동 진씨` 가문을 개창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70살 노장 등자룡

 등자룡은 진린 제독의 휘하 부총병이었다. 절강과 직예(지금으로 치면 서울주변의 수도권 지역) 출신의 정병들을 이끌고 참전한 일흔살의 노장으로 노량해전에서 불꽃처럼 싸우다가 전사했다. 명사(明史) 권247 열전 135 등자룡 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년)에 … 왜가 장차 바다를 건너 피하려하자 진린 도독이 급히 등자룡을 급파, 조선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수군 1000명을 거느리고 3척의 전함을 몰아 선봉이 되었다. 등자룡은 평소에도 강개(慷慨)해 나이가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의기를 더욱 가다듬어 으뜸의 공(首功)을 세우고자 했다"

 "등자룡은 장사 200명을 이끌고 조선 군사의 배에 뛰어올라 바로 앞에서 분격(奮擊)하니 죽거나 다친 적들이 셀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배가 화기(火器)를 잘못 쏴서 등자룡의 배에 불이 붙었다. 이 틈에 왜적들이 배로 기어올라 등자룡을 찔렀다. 이순신이 구하려 달려왔으나 역시(결국) 죽었다. 이 일을 듣고 도독첨사로 추증하였고 아들이 조선에서 묘사(廟祀)하였다"

 등자룡은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노량해전에서는 등자룡은 별도의 수군 일천명을 거느리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전하였는데 전투를 하던 중 진린 장군이 왜병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진린의 아들이 부상을 당한 것을 보고는 이순신의 판옥선으로 바꿔 타고 진격하였으나, 명나라 수군이 그의 배를 왜선으로 오인하여 포격하여 불길에 휩싸이는 통에 배는 더 이상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왜군선 사이로 흘러가는 사이에 배에 오른 왜수군에 의해 등자룡 장군이 전사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전쟁터에서 활약했으며, 1598년(선조31년)에 조선 원병에 나서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이순신 장군도 등자룡 장군이 위급함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자룡을 구출하기 위해 적진 깊숙이 진격했다가 같은 날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날 전사한 등자룡 장군은 등소평의 선조이다.
 
등장군은 중국의 민족영웅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만력제 주익균(명나라 14대 황제:1563~1620)은 수군도 파병키로 하였다. 이에 복건성 순무 진린은 그의 처 친척 아저씨인 두사충과 함께 명나라 정예수군의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임순무 70세 백발의 등자룡은 9명의 아들과 5명의 처첩, 식솔 수십 명과 하인 200여명이 하얀 옷에 흰 두건을 두르고 진린을 찾아왔다. 등자룡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내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싶어 찾아 왔으니 원한을 갚아 달라고(갚게 해달라고) 하자, 진린이 사적인 원수는 국법으로 허가된 것이니 식솔과 하인들에게 한 자루 씩 쥐어주어 죽기로 갚으면 될 것이라 했다.

 등자룡은 "원수가 바다 건너에서 저 누런 바다를 넘어 조선을 침범한 작은 키의 야만족이라면서 조선에 들어 온 왜적의 피를 마시고 그들의 심장과 간을 씹어 먹으리"라고 하자, 다시 진린이 웃으며 "뜻은 장하나 연세가 있으신데 가능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등자룡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부라리며 잠깐 예를 벗어나겠다며 진린의 개를 달라 했다.

 진린이 허락하자 "옛날 염파는 80 나이에 한 끼 식사에 고기 열 근을 먹고 술을 닷 말을 먹었으며 후한의 황충과 엄안은 단기로 적의 적장의 목을 내쳤으니 장사에 나이가 어찌 있겠느냐"며 마당에 있는 개를 잡아 목을 비틀어 죽이고 개의 목을 손으로 끊어 피를 내어 마신 연후에 개 껍질을 벗기어 내어 그 고기를 생으로 먹는데 잠시 후에 개 껍질과 똥만 남고 바닥에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알뜰하게 다 먹었다.

 진린이 그것을 보고 "영감은 참으로 영웅이며 알뜰하게 드셨다"며 탄복했다고 한다. 조선 출병 직전의 이 일화는 참으로 등자룡의 인물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등자룡은 가산을 털어 병선을 하나 사서 아들 9명, 처와 첩 5명, 가족 수십 명, 하인들 200여명과 함께 정유재란 참전을 하였다.
 
화방사에 충무공과 등장군의 사당을 모시고자 한다

 화방사가 충무공의 원찰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화방사 주지로서 일말의 사명감을 가지고 기회를 보다가 나는 지난해 박 군수에게 처음으로 등자룡 장군을 소개하였다. 박 군수는 내 말을 듣고 즉석에서 관음포만 일대에 조성중인 이충무공 순국공원 조성사업 현장에 등자룡 장군의 활약을 소개하는 기념공간을 조성하자고 하였는데, 이번 방중에서 바로 그 계획을 밝혔다고 한다. 풍성시 부시장도 "등자룡 장군 기념공간 조성에 적극 협조하겠다"며 "남해군과 지속적인 교류 협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니 좋은 일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다. 화방사에 사당을 짓고 두 분을 모시고자 한다. 이것은 화방사가 남해충렬사의 수호사찰로, 충무공의의 원찰로 자기 사명을 되찾는 첫발이 될 것이다. 충무공 순국공원과 등자룡 장군 기념관, 충렬사와 화방사는 뭔가 궁합이 맞지 않는가?

 여기에 화방사가 힘을 보태어 추진해온 고려대장경 판각지 사업까지 염두에 둔다면 말이 되고 스토리가 된다. 이만한 역사적 스토리와 문화적 의미라면 우리 남해 전체를 살리는 하나의 대책이 될 거라고 본다. 지금 남해문제는 불균형발전에 있다. 남동부 관광벨트가 활성화 되면서 읍을 포함한 북서부가 상대적으로 힘에 부친다. 이 때 화방사와 충렬사, 순국공원과 등자룡기념관, 그리고 고려대장경 판각지는 남해 북서부 발전의 모티브이자 남해 균형발전의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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