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청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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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청춘에게
  • 남해타임즈
  • 승인 2015.04.03 14:20
  • 호수 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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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창선독자
 대학 문을 나서 삶의 격전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회초년병들을 보며 졸업 시즌을 실감한다. 하지만 높은 청년실업률 때문에 사회에 첫 발을 디디는 그들에게 마음 편히 축하인사를 건네기가 어렵다. 뜻을 펼치기도 전에 젊은 꿈과 야망이 시들면 어떡하나, 도전 정신보다 절망과 좌절을 먼저 배우면 어떡하나 우려된다. 어쩌면 늘 그래왔듯, 청춘의 시간이란 눈부시게 아름다운 만큼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 구직희망자의 대다수는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지만,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격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그것으로 행복 시작은 아니다. 기업이란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지 자선사업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뛰지 않으면 고액의 연봉은 없다. 중소기업은 내실을 갖춘 업체마저도 낮은 선호도 탓에 인력난에 허덕인다고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힘겹게 이어가거나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한 아픈 청춘들이 있다.

 이런 상황들이 OECD 최고 수준의 대학진학률을 자랑하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게다가 `인문학의 위기`라느니, 인문학과의 통폐합이라느니, `SKY` 인문학과를 졸업하고도 백수 신세라느니 하는 세간의 흉흉한 분위기가 인문계열 전공자들을 위축시킨다.

 청년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이거늘, 이들의 축 처진 어깨를 세워 신바람 나게 만들 묘책은 없을까.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묘안은 없는 것일까. 처방이 그리 간단할 것 같으면 정부가 청년실업률의 고공 행진을 두고 볼 리 만무하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여의치 않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해법을 제시하기만을 기다리기보다,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열쇠는 본인이 쥐고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했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문제 원인과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직업을 가졌나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의 가치관을 가졌나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 직업에 대한 편견과 차별 또는 학력 차별도 점차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 다음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눈높이를 낮추고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것을 조심스레 권해 본다.

 일하다가도 때때로 숨 돌릴 여유가 있고,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로 살 수 있고, 먹고 살만큼의 수입이 되는 정도면 어떨까. 영양실조보다 영양과다로 탈이 나는 세상이다. 덜 벌어 덜 먹고 덜 쓰더라도 몸과 마음의 균형을 지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붕어빵틀에서 나오는 붕어빵 같은 획일적인 삶이나, 어딘가에 종속되어 남의 눈치를 보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조금 억울하지 않은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원하고 적게 벌어도 당당할 수 있다면, 지나치게 분주한 삶의 허망을 경계하고 자발적 가난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인생의 선배로서 한 수 알려 주고 싶다. 

 그리고 대학은 직업훈련기관이 아니다. 입학 직후부터 진로를 걱정한 나머지 세상과 타협하며 적성을 포기하는 것은 안타깝다. 너나없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기, 학과 공부보다 취업에 유리한 스펙 쌓기 등이 그렇다. 일생에서 학문을 연마하기 딱 좋은 청춘의 시기, 열정과 의지로 충만한 배움의 길 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에 원 없이 몰두해 보는 것이야말로 대학생활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어느 한 분야에 열정을 가지고 몰입했던 젊은 날의 뜨거운 기억은, 두고두고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밥벌이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온몸을 내던지는 패기야말로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아닐까.

 입신양명이 최고의 가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내가 유학 차 일본에 머무를 때 품은 의문이 있었다. 직장인들이 승진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직위가 높아질수록 책임감은 늘어나고 개인 시간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풍조가 경기 침체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는지 최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가난한 젊은이들이 욕심을 덜어냄으로써 물질적 빈곤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가 호황일 때보다 슬럼프에 빠진 지금 외려 행복지수가 높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수긍이 된다.

 길 위에서 헤매어도 좋은 것이 인생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여러 갈래 길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이리저리 가 볼 것을, 편하고 곧은길만 고집하던 나의 젊은 날이 못내 아쉽다. 청년들은 앞으로 몇 번이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생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포함한 모든 청춘들에게 고한다. 정녕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두려움 없이 가라고. 그대들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더라도 흔들림 없이 그대들을 지지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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