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은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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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은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15.05.06 15:41
  • 호수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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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문화해설사 서재심의 이순신 이야기3

지금 얼굴이 아무리 예쁜 사람도 살면서 짜증을 자주 내거나 좋은 생각이나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이 마흔이 넘으면 흉하게 될 것이고 지금 예쁜 얼굴이 아닌 사람은 살면서 늘 웃고 좋은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면 마흔이 넘으면 품격 있는 얼굴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말과 좋은 생각으로 마흔이 넘으면 편안하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이 되기를 바란다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그 가슴 속엔 담력이 있어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평소 수양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충무공 이순신의 외모에 관해 남긴 글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인물들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나라에서 공신에게 공신녹권과 함께 그 초상화를 모시게끔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무공께서는 돌아가신 뒤에 공신에 책봉되었기에 살아생전에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의 초상화는 사후에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상화 중에 무관의 옷을 입고 있는 충무공의 초상화는 정형모 화백이 `징비록` 에 있는 서애 류성룡 대감의 이순신의 외모를 평한 글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덕수이씨 50대 남자들을 관찰 한 뒤에 그려진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또 문관 옷을 입은 충무공의 초상화는 장우성 화백이 충무공 이순신의 14세손을 모델로 해 그렸다고 한다. <사진>

 마치 사진같은 위 초상화는 역사스페셜에서 보여 준 충무공의 초상화다. 나는 간혹 충무공의 꿈을 꾸는데, 사진과내 꿈에 나타난 충무공의 모습은 흡사하다. 아래 초상화는 임진왜란 중 왜구 중 충무공을 한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스케치한 그림을 보고 다시 그렸다는 말도 있다. 충무공의 꿈을 꾸기 전에는 나는 이 초상화를 만난 적이 없다. 2014년 2월18일 꿈에 충무공을 뵙고 난 이후 나는 더더욱 `이순신` 관련 자료를 찾아다니다가 오래 전에 방영했던 역사스페셜을 보게 되었고, 또 인터넷에서 이 사진을 만났다. 순간 너무 놀라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맨날 꿈에 보여 달라고 할 때는 늘 문관 옷을 입은 충무공을 상상하면서 기도도 하였다. 또 해설을 할 적에도 늘 문관 옷을 입은 초상화를 머리에 그리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을 생각 한다. 여고 1학년 때 국어선생님께서, "공자님은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일가를 이루었고, 사십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십에는 하늘에 뜻을 알았으며, 육십에는 귀로 듣는 모든 말들을 다 이해 할 수 있었고, 칠십에는 어떤 행동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십이 되면  불혹의 나이라고 한다. 그 뜻은 사람이 나이 사십이 되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 끝에 이 말씀도 덧붙여 말씀하셨다.

 "지금 얼굴이 아무리 예쁜 사람도 살면서 짜증을 자주 내거나 좋은 생각이나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이 마흔이 넘으면 흉하게 될 것이고 지금 예쁜 얼굴이 아닌 사람은 살면서 늘 웃고 좋은 생각과 바른 행동을 하면 마흔이 넘으면 품격 있는 얼굴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말과 좋은 생각으로 마흔이 넘으면 편안하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공자이야기, 논어란 책 이야기를 수업 중간에 잠깐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초등 6년,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참 많은 스승을 만났고, 수업을 받으면서 엄청난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이 말씀처럼 살면서 내 귓전에 남아 내게 영향을 주었던 말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이후 살아오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면서 짜증나는 일도 많았고, 화가 나는 일도 많았고, 삶에 회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 그러나 항상 국어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지금 화를 내면 사십 이후 내 모습이 추해지면 어떡하나? 참아야지 웃어야지`

 내게 최면을 걸면서 살아왔다. 물론 그래도 정말 참지 못 하고 화를 낸 적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채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 내 모습은 남에게 그렇게 흉하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외모를 평한 글을 보면, `근신하고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보면 알지만 나이가 오십이 넘은 사람들을 만났을 적에 첫 인상에, `야 참 곱게 늙었다. 참 품격 있는 얼굴이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얼굴이 있고, `인상 뭐 저런가, 인색하게 생겼다. 참 추하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얼굴이 있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 보여 지는 얼굴은 그 사람의 지난 세월을 보여 준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충무공의 초상화나 살아생전 보았던 분이 평했던 말이니 진실성이 있을 것이다. 충무공이 사셨던 그 시대  시기 질투와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했던 충무공의 외모를 `늘 근신하고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 고 한 것을 보면 그분의 외모가 얼마나 단아 했을지 짐작이 되어 진다. 여고시절 국어 선생님 말씀처럼 충무공께서는 아마 늘 좋은 생각과 올바른 행동, 그리고 대의를 위해서 사시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은 분이니 당연히 만들어지고 풍겨진 외모일 것이다.

서재심
문화해설사
 충무공께서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시고 아산에 있는 초장지 금정산에 1599년 2월11일 모셔지기까지 약 84일 날짜가 흐르는 동안 잠시 안치되어 계셨던 남해 충렬사에 가면 장우성 화백이 그린 붉은 문관 옷을 입은 충무공 이순신이 모셔져 있다. 징비록의 외모참조와 충무공의 14세손을 모델로 해서 그렸다고 하지만 나는 생전의 충무공을 뵙는 듯이 웃으며 감사 인사도 드리고 말도 걸어 본다. "장군님, 정말 멋져요. 당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당신이 살 던 그때에 제가 태어났다면 제가 장군님을 위해서 희생 봉사 했을 텐데 아쉬워요"라고 사랑고백을 한다. 간혹 가족끼리 충무공 관련 유적지를 가면 제가 소리 내어 말도 걸고 사랑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 남편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니 보고 돌아이라고 하는 거다" 그럼 나는 명량하게 웃으면서 "하든지 말든지" 라고 큰 소리를 친다. 아마 하늘에서 보고 계시다면 빙그레 웃으시겠지? 대대손손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 있을 이름 `이순신.` 그 분은 근신하고 수양하는 선비 같았다고 한다. 나도 먼 훗날 누군가가 내 외모를 그렇게 평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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