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정읍현감의 능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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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정읍현감의 능력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5.07.14 12:08
  • 호수 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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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심 문화해설사

 나는 남해도에서 태어나 여고시절 버스로 통학을 하면서 내 고향 남해에 반해서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나 남해예찬을 하고 있다.

 버스투어를 나갈  적에는 맨 처음멘트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남해예찬론자이구요, 시(詩) 예찬, 자연 예찬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예찬론자입니다" 하고 시작을 한다.

 그리고 마흔까지는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생활전선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앎에 대한 갈증으로 지치고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고됨을 신문과 책을 읽는 것으로 앎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흔 살에 하던 일을 접고 정말 운명처럼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교육을 받았다. 헌데 어린 날부터 반했던 남해의 자연과 바쁜 일상에서도 틈틈이 외웠던 詩, 그리고 읽었던 신문과 책, 충무공 이순신이야기가 우물이  넘치듯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서 그랬는지  교육을 받고 바로 현장해설을 했지만, 아무리 지위가 높고 꽤 이름이 알려진 유명 인사들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늘 당당할 수 있었다.

 물론 사물을 다 꿰뚫을 정도의 실력과 능력은 아니어도  늘 관심이 있었고 사랑하던 것에 대한 연장선에서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즐거웠고 행복했고 신이 났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이처럼 이순신도 무관시험 이전에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으로 사람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할 수 있는 예, 신, 인, 덕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기에  초임근무지 북방변방에서 실전과 경험으로 준비 된 분이셨기에 정읍현감으로 부임 해 그 지역사람들이  칭송이 자자할 정도의 업무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지는 않았어도  이순신이 어떤 자세로 지방수령의 자리를 보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시고 그 뒤 조선은 충렬사라는 사당을 지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충렬사는 정읍현감을 했던 정읍과 그리고 통제영을 설치했던 통영, 전사하시고 잠시 그 충무공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던 남해에 충렬사가 있다.

 흔히 우리는 "준비 된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 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준비된 정읍현감이었고, 그래서 그 능력을 백배 발휘를 했던 것이다. 이런 예로 보더라도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남의 능력을 시기 질투하고 음해하여 능력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하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해서 그 능력을 백배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조력자들이 됐으면 좋겠다. 

 정읍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석인 태인현의 밀린 서류까지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  함으로써 지켜 본 사람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었던 이순신은  다음해 고사리진(함경북도 강계) 첨사로 임명을 받게 된다.
 하지만 대간들이 임명을 다 채우지 못 한 수령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취소가 된다.

 대간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언론기관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해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만포진 첨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이유로 대간들이 또 다시 반대를 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승진이 너무 빠르면 일종의 인사청문회 같은 것이 있어 대간들이 적임자가 임명이 되었는지 집안이나 개인에게 문제가 없는지, 너무 지나친 승진은 아닌지 검증을 해 보아서 한 가지라도 결격사유가 있을 경우 그 승진을 취소하는 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있을 당시 전운이 감돌았고 그래서 선조임금이 과해도 상관없으니 인재를 추천하라고 했다. 이런 것을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고 하는데, 전운이 감돌고 있으니 순서를 뛰어 넘어 인재를 추천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서애 류성룡이나 우의정 정언신 두 사람이 똑같이 이순신을 추천하게 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대간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선조임금은,"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며 임명을 강행했다. 여기서 하나 상식적인 것을 언급한다면,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다. 예전에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내려다보면 전라도 해남은 오른쪽 왼쪽은 여수라 전라우수영은 해남이고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 있었다. 똑같은 맥락으로  경남우수영은 거제고 경상좌수영은 부산인 것이다. 그 당시 전라우수사는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었다.

 전라좌수영 관할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5관5포가 있었다. 다시 언급을  해 본다면 5관은 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지금의 고흥)이고 5포는 방답진, 여도진, 사도진, 발포진, 녹도진을 말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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