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바뀐 박영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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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바뀐 박영효의 삶
  • 남해타임즈
  • 승인 2015.09.16 13:35
  • 호수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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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157
남해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김성철

근대한국사에서 영광과 고뇌, 오욕의 삶을 살아온 박영효. 그는 1872년(고종 9) 12세 때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에 봉해지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어린 시절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파인 오경석, 유대치 등을 만나 자주독립적 개화사상에 심취했다. 그리고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을 만들었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팔괘를 기초로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박영효는 수신사로 체류하는 동안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의 발전에 감명을 받고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함께 일본으로 간 김옥균, 서광범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정권은 천청사대파인 민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본군을 동원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해 `건백서`(建白書)라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려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 확립에 의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 때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20여 명의 일행과 함께 두 번째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박영효는 망명 중인 1900년 7월 고베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 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1907년 귀국하여 용서를 받고 이완용정부의 궁내부대신이 된 박영효는 헤이그 밀사사건 후폭풍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의 고종 양위 압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무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907년 8월 27일 47세의 나이로 제주에 유배된 박영효는 조천리 김희주의 집을 적거지로 삼았다. 박영효는 유배시절 제주도 천주교 최초의 신부인 라쿠르가 근대 여성학교인 신성여학교를 개교하는 데 힘을 실어줬다. 그리고 제주도의 기후에 맞는 과수와 원예작물을 재배하면서 성공한 작물을 제주도 사람들에게 권장하는 활동을 했다. 이때 감귤류, 감, 대추, 양배추, 토마토, 당근 등이 보급되었다. 그것은 두 차례에 걸쳐 20여 년 동안 일본 망명생활에서 체득한 것을 실천한 것이었다.

박영효는 유배 1년을 원예농사 외에도 시국관 강론을 통해 제주도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근대사상을 심었다. 그리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신학문 소개를 통해 제주도민에게 개화사상을 심어주었다. 박영효가 친분이 있는 조천의 적거지에서 석 달 후 제주성 남쪽 독짓골로 유배지를 옮긴 것은 제주에서 여생을 마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 유배가 풀린 후 한참 동안 제주에 머물렀다고 한다.

젊은 시절 철종의 부마로 개화파를 이끌던 박영효는 20여 년의 일본 망명과 제주 유배라는 굴절을 겪어야 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잃는 치욕은 그에게는 오욕의 삶을 감내해야 하는 날이었다. 차라리 1894년 상하이로 망명해 암살 당한 김옥균의 삶이 부러웠을지도 몰랐다. 

결국 그는 10월 7일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는 후작의 작위를 받고 말았다. 그 뒤 중추원 고문, 식산은행 이사에 취임했다. 그리고 3·1독립운동 때에 민족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외면하면서 민족을 위한 대오에 설 마지막 기회마저 잃고 말았다. 1920년 4월 1일 그는 민족지를 표방한 창간 당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기도 하고 1925년에는 일제의 서훈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세상일에 순종하는 자세로 일관하다 1939년 오만을 짊어진 채 생을 마감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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