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40년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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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40년 우정
  • 강영자 기자
  • 승인 2016.06.21 09:51
  • 호수 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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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죽마고우(竹馬故友) 간첩수색작전 중에 떠난 친구 故 이무기, 환갑이 돼 만나다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이는 꽃을 보려했던 한 화가의 이야기다. 그러하다. 우리는 작은 무엇에 눈길을 머물 틈이 없고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만큼 주의 깊지 않다. 가장 흔한 이유로는 먹고 살기가 바빠서. 또 다른 이유는 각자의 몫으로 말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전쟁터 속에서 이따금 길을 잃을 때, 친구라는 나침반을 항상 찾게 된다.
하지만 이내 안다. 아는 사람은 많아도 친구는 적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탄식해본들 세월은 화살인 것이다.

죽마고우(竹馬故友)와의 술 한 잔
고현면 대곡마을, 이 곳에 있던 친구의 집이 그리워 고향 친구들이 지난 현충일, 순국선열의 날인 그날 대전의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바로 스물 넷, 싱그러운 나이에 생을 달리한 친구 이무기를 찾아서였다.

죽마고우(竹馬故友) 열 댓 명이 모였다. 이제는 환갑이 되어가는 세월이 무색하다.

지금은 마산에 살고 있는 친구 이철구 씨가 우정의 제물(祭物)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여자 친구들도 몇 모였다. 서울과 원주에서도 오고, 고향 남해에서도 친구들이 왔다. 고향인 대곡마을을 지키며 한실한의원을 운영하며 친구들의 건강을 알뜰히 챙기는 이양기 씨 또한 이날만큼은 청년 시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친구에게 술 한 잔을 건넸다. 

`스물넷`의 `간첩수색작전`
故 이무기 씨는 영원한 스물넷의 청년이다. 1979년도 10월, 간첩수색작전을 펼치다 강원도 양구에서 비무장지대 안에서 죽음을 만났기 때문이다. `크레모아`라는 후폭풍이 강한 대량살상무기인 그것을 같이 보초를 서다가 철수하던 동료가 잘못 건드린 탓에 그만 생을 달리했다. 

수 백 개의 구슬로 이뤄진 그 무기의 파편이 이무기 씨의 간을 관통하면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이철구 씨는 "아마 살아있었다면 유명한 예능인이 돼 있을 만큼 인기도 많고 다재다능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의 죽음이 동네에 알려졌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목을 놓고 울 정도였다.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을 능가할 정도로 유머가 넘치고 `오봉산 타령`이나 `갑돌이 갑순이`같은 창(唱)타령도 잘하고 장구도 잘 쳐서 남녀노소 막론하고 인기가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날 고현면 대곡마을 친구들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이무기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다만 이따금 잊은 줄로만 알았을 뿐. 매해 꼬빡 챙기지는 못해도 우리네 갈지자 인생처럼 지그재그를 그어가며 원주에서, 서울에서, 창원에서, 다시 남해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마다 돌아오는 `순국선열의 날`이 되면 박정희 대통령이 아닌 `그 이름만 떠올려도 웃음이 나오는 친구 이무기`를 만나러 가기 때문일 것이다.

한실한의원 이양기 원장은 "죽마고우야말로 가장 허심탄회한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아닌가 싶다. 한 개인의 역사를 충분히 아는 벗, 가장 허물이 없는 그런 친구 말이다"라고 말하며 "그 친구가 살아있었다면…참 좋은 친구인데…"하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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