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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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 남해타임즈
  • 승인 2016.09.27 12:12
  • 호수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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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희 자
본지 칼럼니스트
수필가

지루한 여름이 꼬리를 내렸다.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40도 가깝게 오르던 무더위를 단 한 번 지나간 비가 꺾어버렸다. 지옥 같았던 올여름에는 누구나 무사였다. 푹푹 찌는 무더위를 이겨낸 것만으로도 승리자라 말할 수 있으리라. 유별나게 무더웠던 여름이라 기다림은 깊었다. 지나가던 실바람이 가을 마중을 가자고 꼬드겨 산사에 왔다. 

산 그림자 길게 눕고 저녁 냉기가 절 마당으로 슬며시 내린다. 둥둥 북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산사를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두드린다.

잠시 마음의 길을 잃었던 나그네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절집 입구로 발걸음을 옮긴다. 잿빛 장삼에 붉은 가사를 두른 여승이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린다. 둥글게 퍼져나가는 법고소리에 불어오던 바람도 발길을 멈추었는지 사방은 고요하다.

어스름한 숲을 흔드는 북소리는 저녁 예불 시간을 알리는 신호다. 범종루에 올라선 여승이 법고를 친다. 그 옆에는 도반 두 명이 서서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두 개의 북채를 든 여승이 마음심(心)자를 그리며 북을 두드린다. 

북소리는 시작의 소리이다. 하루를 반성하고 마감하는 의식이다. 법고의 울림은 일심을 돌아볼 것을 바라고 구한다. 참마음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원천으로 되돌아갈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심(心)`자형의 소리를 중생계 속으로 울려 퍼지게 한다. 북소리는 산을 흔들고 세간에 퍼져 중생의 마음을 일깨운다. 

저녁노을을 등진 북소리가 더 깊게 산문을 울리며 나에게 묻는다. 네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마음속에 울리는 북소리는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길을 떠나게도 하고, 명상이 되기도 한다. 산문을 깨우는 법고소리를 듣고 있으니 잠든 영혼이 깨어난다. 마당에 서서 북소리를 듣던 후박나무 잎이 뚝! 하고 떨어져 내린다. 

북소리에 깊이 빠져드니 까닭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날 것만 같고,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울리는 것 같다. 가끔, 모든 것을 내려두고 무심해져 있을 때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내 마음의 북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아득한 의식의 저 편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으라는 북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이제 어서 일어나라고. 다시 시작하라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 어서 길을 떠나라고 울림을 줄 때가 있다. 그 마음의 소리를 듣다보면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잠든 나를 깨우기도 한다. 

몇 해 전, 매화산에 들었다가 숲 속에서 북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푸른 숲에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지고, 숲 속에 핀 들꽃들이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산행길에서 들은 북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해인사에서 시작된 북소리는 솔숲과 계곡을 지나고, 작은 산을 넘어 은은하게 들려왔다. 북소리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은 나는 그 소리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내 마음을 흔들었던 그때의 북소리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내 마음의 북소리가 되어 있다. 나는 가끔 산에 들었다가 북소리를 듣곤 한다. 내가 듣는 북소리는 산이 내는 소리였다. 그 울림은 산과 어우러져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하늘이 내는 북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일심을 그리며 은은하게 휘도는 한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북소리는 북채를 잡은 이의 몸동작과 마음,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북채를 잡은 이의 몸동작이 커지면 북소리도 커지고, 북채를 잡은 이의 손놀림이 작아지면 북소리도 작아진다. 노한 마음으로 북을 두드리면 북소리가 격하게 들리고 우울한 마음으로 북을 두드리면 북소리는 슬퍼질 수밖에 없다. 

또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슬픈 사람에게는 아련하고도 가련한 리듬으로 애처롭고, 기쁜 사람에게는 경쾌한 리듬으로 각각의 음색을 달리하며 즐거운 소리로 가슴으로 파고든다. 북소리와 심장의 고동소리는 닮았다. 마음의 긴장감이 더해지면 북소리는 더 큰 울림이 되며, 심장의 고동 소리도 숲속 하늘에 석양이 되어 물든다. 

이처럼 북소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탁류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와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깨어있게 한다. 내 마음의 북소리는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존재의 가치를 일깨울 수 있는 가르침으로 전해진다. 숲에서 저녁 안개가 내려와 절집 마당에 깔린다. 북소리를 들으며 녹이 슨 시간 속의 꿈을 일시에 헐어버리고 저무는 절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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