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꽃이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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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꽃이고 싶은 날
  • 남해타임즈
  • 승인 2016.10.18 15:39
  • 호수 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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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관 호
시인, 수필가

<2009년 10월 17일 토요일 맑음>
기온이 조금 떨어지니까 가을 맛이 더 짜릿하다. 중부 산간의 결빙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은데도 가을 아침은 설렌다. 가슴을 여미고 배를 불리는 배추가 햇살을 맞는 모습이 의욕에 차있고, 노란 소국(小菊)은 서리라도 기다린 듯 일찍 깨어나서 웃는다.

조용한 아침, 복도에서 처음 만난 4학년 쯤 되는 한 남자 어린이가 인사를 했다. 한 손에는 책가방, 또 한 손에는 신발이 들렸다. 책가방을 든 왼손은 무겁지만, 신발 든 오른손을 얼른 들어 올려 공수자세를 취하며 인사하는 모습이 보통 아이가 아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공수인사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다. 아마도 전학 온 학생인 듯하지만 그것이 몸에 배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인사를 하지 않기도 하는데, 공수에다 표정과 말투, 목소리까지 인사예절 하나는 똑 부러지는 아이다. 오늘은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아서 아침부터 콧노래가 나왔다.

토요일 아침나절은 쏜살처럼 흘러가고 종종걸음으로 긴 복도를 막 빠져나오려는데 3학년 정도의 한 여자 어린이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 상냥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끝말이 나를 잡아끌어서 걸음은 멈추지 않았는데도 마치 뒷걸음질 치는 것만 같았다.

보통 때는 단답형으로 "예"하거나, "오! 그래"하는데, 이번에는 저절로 "오! 고마워, 잘 가"하였다. 오늘은 노변의 코스모스가 더욱 다정해 보이고, 가로수 은행나무도 힘껏 영랑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수십 명 아이들 중에 유난히 목소리가 상냥하고 인사성이 밝은 몇몇 어린이를 만나면 하루해가 즐겁고 짧아진다.

생김새가 예쁘거나 차림새가 특별히 깔끔하지 않은데도 그 부모님의 고상한 품위까지도 그려지면서 행복한 가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까지 기억에 남아있어서 훌륭한 인물이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으면서도 내 자식들이 세상에서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주기를 염원한다. 

경주 양남에서 만난 2학년 한 여자 어린이는 인사성이 유난히 밝은데다가 아침에 일찍 등교하였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면 학교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이 아이였다.

이 아이에게 인사를 받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일이었기에 내심 어디서 만날까 찾다가도 내가 먼저 발견하지 못하고 걔가 먼저 인사를 하곤 했다. 연못에 흰 수련이 피어나던 여름날 아침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던 수련보다 예쁜 소녀가 7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삼삼하지만 얼마나 상냥하고 향기로운 소녀인지 독자들에게 들려드리고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일견, 이런 인사 잘하고 친절한 성품의 아이를 만나는 것은 학교에서야 흔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야 내 아이도 어릴 때 그러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인사나 친절, 그리고 나아가서 인성에 관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행한 적도 없고, 또한 본 적도 없다. 물론 23년이나 교단을 떠나있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국민윤리를 강의하던 시절에도 얄팍한 지식 조각들로 시간을 채웠을 뿐, 사람됨이 운명도 바꾼다는 사실은 말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가르칠 자식도 커버렸고, 교단에서도 물러나야 할 시점에 이르러서야 세상이 다시 보인다. 저 아이가 나중에 장사를 한다면 반드시 대성하게 되리라는 믿음, 저 아이가 소속하는 조직의 분위기가 활기차고 역동적일 것이라는 확신이 나로 하여금 평생 그 아이를 추적하고 싶은 충동으로 나를 몰고 간다.

인간의 능력을 전문성과 창의성, 그리고 인간성이라고 규정한 학자들의 정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얼마만큼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치가 아닐까? `지혜는 무디었더라도 마음만은 부드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후회 말이다.

이제 겨우 한 해를 남겨놓은 교단에서 천방지축 철부지들에게 목이 마르게 외치고 또 외쳐본다. "너희가 아무리 실력이 있고 좋은 기술을 가졌다 한들 사람됨이 부족한 사람과 누가 함께 일하고자 하겠느냐?"고, 그리고 내 자식들에겐 "너희가 사람을 아끼는 것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이다.

내게 만약 또 한 번의 생애가 주어진다면 기필코 나는 식물이 되고 싶다. 그것은 누가 보아주든 보아주지 않든지 간에 제 고운 마음을 보여주려 스스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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