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우리 가족 불행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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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우리 가족 불행의 씨앗이었다"
  • 이충열
  • 승인 2017.08.31 12:01
  • 호수 5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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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면 정초연 할머니 피폭 후 칠십 평생 고통속에 살아 부모와 두 동생 사망, 여동생 질병
히로시마 원폭 피해 당시 히로시마 시 외곽에서 원폭 구름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정초연 할머니는 피폭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두 남동생의 죽음과 피폭으로 인한 기형으로 추정되는 병을 앓는 자녀들에 대한 근심을 털어놨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 중심가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 때 정초연(현재 78세, 당시 6세) 할머니는 히로시마 외곽 마을에서 어머니와 남동생 2명(4살과 3살)과 함께 있었다. 아버지 정봉윤 씨는 히로시마에 있었지만 당시 가족들과 같은 장소에 있지는 않았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지진이 난 듯 땅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마을 집과 상가 건물의 유리창들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면서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정초연 할머니 가족은 본능적으로 땅에 엎드렸다. 정초연 할머니와 가족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당시 6살이던 정초연 할머니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머니(박분순)와 두 남동생은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였다. 어머니에게 다가가 깨우며 두리번거리던 정 할머니는 히로시마 시의 중심가 쪽 하늘을 뒤덮고 있던 한 무리 하얀 뭉게구름을 봤다. 원폭 구름이었다.     
해방이 되자 정초연 할머니의 가족은 귀국해 합천군에 자리를 잡았다. 귀국 직후 정초연 할머니의 가족은 아버지 정봉윤 씨와 어머니 박분순 씨, 그리고 정초연 할머니와 남동생 둘이었다. 귀국 후 원자폭탄 피해로 두 남동생은 시름시름 앓더니 1948년 목숨을 잃었다.  합천에 머물고 생활하면서 뒤에 당시 정초연 씨는 남동생 2명과 여동생 3명을 더 얻었다.  

그런데 원폭 영향이 2세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일까. 둘째 여동생이 콩팥이 하나 없는 채로 태어난 것이다. 또 세 번째 남동생의 얼굴에는 버짐처럼 보이는 검은 딱지가 곳곳에 생기고 얼굴은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 입술이 마르는지 입가에 하얀 이끼같은 태가 끼었다.  
 
아버지 정봉윤 씨에게서도 피폭 증상이 나타났다. 정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얼굴은 화상 입은 것처럼 검고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앙상했다"고 술회하면서 "머리에 군데군데 떡덩어리 같은 부스럼 증상이 생겨나 아버지도 고생고생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정초연 할머니 본인도 일찍부터 여기 저기 아픈 증세가 나타났다. 정 할머니가 창선면 출신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식욕이 없어지고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증상이 70세까지 따라다녔다. 정 할머니는 "손발이 떨리고 온 몸에 힘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피부가 얇아져서 그런지 손과 발에 조금만 압박이 가해져도 고통스러웠다"며 "병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몸 아픈 증세는 잘 안 없어진다. 지금도 남편이 손이나 발을 만지면 아프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몸이 너무 아파 `죽을 때 죽더라도 원인이라도 알고 죽자`는 심정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7년쯤 전부터 서울 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조금 진정됐다. 아산병원에서는 정 할머니 병의 원인에 대해 "참 희귀한 병이다"는 말만 하고 정확한 병명을 말해 주지 않았다.  

자녀 두명도 `이유모를` 고통이어져

정초연 할머니 슬하의 자녀들 중 둘째 딸과 막내도 검은 얼굴빛, 머리카락 빠짐 증상이 나타났다. 특히 막내딸은 몸과 얼굴 등이 붓는 증상이 심했고 머리카락도 한웅큼씩 빠져 사람 만나기가 겁날 지경이라고 한다. 치료차 병원에 가면 `참 모를 병`이라는 답변만 돌아온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남동생의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한 죽음, 동생들과 아이들의 희귀한 병증을 보아 오면서 정초연 할머니는 "병명이라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일본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해자 모임에 피폭자 신고를 해 봤지만 피폭 당시 병원 치료기록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 할머니는 피폭 후 병원에 방문해 치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고 당시 원폭피해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상황이어서 병원 치료는 가능하지도 않았고 꿈꾸지 못했다. 

정부에 진상확인과
진료지원 대책 요구 

국내 원폭피해자 조사에서는 당시 일본 거주지 주소를 말해 봤지만 "그곳은 원폭 피해를 볼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는 말만 하고 정 할머니가 겪고 있는 병이 원폭 피해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단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정초연 할머니는 "정부가 환자 입장에서 문제를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아 서운하다"며 "정부가 원자력으로 인한 피해인지 아닌지 진료를 통해 알 수 있을 거 아닌가. 세상 천지 혼란할 당시에 병원 갔던 진료기록만 요구하니 제대로 피폭자를 구분해 낼 수 있겠는가 말이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정 할머니는 "나는 그렇다 쳐도 우리 애들은 어쩌란 말인가"라며 "우리 애가 콩팥 없이 태어났어. 그게 정상 아니지 않느냐. 내가 원폭 피해자면 우리 애들, 우리 애들의 애들도 줄줄이 문제야"라고 정부의 정확한 진료와 진상확인을 요구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5만여 명 이상의 한국인이 즉사했으며 귀국후 수만명의 한국인들이 피폭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원폭피해자 1세대 2500여 명만 등록돼 적십자의 지원을 소규모로 받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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