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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징용자 구제, 정부가 나서면 가능할 게야"고현 박동규(92세) 씨, 17세에 나가사키 곤바야시 광산 노동자로 징집 군내 일제 강제징용자 생존자 17명 군민들의 관심 기대
이충열 기자 | 승인2017.09.07 11:55|(564호)
박동규 어르신은 1943년 고현 포상마을에서 청년 7~8명과 함께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나가사키의 곤바야시라는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당시 인건비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철조망 둘러쳐 진 탄광에서 죽어라, 석탄만 캤지" 
1943년 당시 남해 고현면 포상마을에서는 8명의 청년들이 일본군에 의해 징집됐다. 당시 17세였던 박동규 어르신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읍 선소마을 부둣가로 끌려가니 수많은 청년들이 함께 끌려나와 삼천포로 건너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남해 사람들과 함께 박동규 어르신은 삼천포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기차에 태워져 부산으로 달렸다. 저녁에 부산항을 떠난 배는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닿았다. 

시모노세키 항구에 징용자를 내린 일본군은 박동규 어르신이 속한 징용자 무리를 주로 밤을 이용해 데려다가 나가사키의 곤바야시라는 촌락에 있는 탄광으로 데려갔다. 
   
철조망으로 둘러쳐 진 곤바야시 탄광. 박동규 어르신은 도착한 그날부터 도망칠 엄두도 못내고 약 20도 가량 경사도에 50여 미터 깊이의 탄광으로 들고 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어떤 날에는 주간반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다른 날에는 야간반으로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죽어라 석탄만 캤다.  

징용자들은 일하러 갈 때는 탄광 갱도를 따라 걸어 내려갔고 일 마치고 나올 땐 석탄 운반차에 몸을 싣고 올라왔다. 

석탄을 캐는 갱도 끝 부분의 높이는 대략 70cm, 박동규 어르신은 쪼그리고 앉은 자세에서 목을 오른쪽으로 젖히고 곡괭이질을 수없이 해야만 했다고 증언했다. "말 그대로 죽어라 석탄만 캤지. 그짓을 해방될 때까지 줄곧 했었다"라며 "허리도 아팠을 뿐 아니라 목과 어깨 근육이 경직되기도 했었다"고 박동규 어르신은 회상했다. 긴 시간 그런 작업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병들거나 탄광갱도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

탄광 작업 후 받은 전표(식권)를 배식담당에게 제출하면 콩밥을 주었다. 식사 메뉴는 콩밥(말 그대로 쌀이나 보리가 섞이지 않은, 콩으로 지은 끼니) 한 그릇에, 국물이나 반찬은 변변찮았다. 일 끝나면 다른 일과나 여가시간도 없이 합숙소로 와 골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곳 탄광 징용자들은 철조망 안 합숙소에서 단체로 잠을 자고 생활했다. 나날이 폐에 쌓이는 석탄가루는 박동규 어르신의 건강을 잠식했다.  

해방 후 강제징용 잊고 싶었건만

그런 시간을 2년동안 보내던 어느 날 일본군 탄광업자와 일본군 장교가 함께 탄광 징용자들을 불러 모으더니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해방이었다. 그렇게 일한 노임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일본에서 추방되다시피 쫓겨 광복되던 해 9월 어느날 다시 부산으로 왔다. 부산에서 기차로 진주까지 왔고 걸어서 삼천포로, 다시 배를 타고 남해로 들어왔다. 
     
박동규 어르신은 다시 고향 포상마을로 돌아왔지만 악화된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그래도 젊어서 좀 나았던지 기력을 가다듬어 현재 탑동마을로 이사와 얼마 되지 않은 농사를 짓고 틈틈이 계란도 내다 팔아 연명해 왔다고 한다. 

박동규 어르신은 "평소 온 만신에 힘이 하나도 없고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럽고 허리 아프고 영 못 움직이겠다"며 "병원에 자주 다녀오는데 옛날부터 폐가 안좋았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박동규 어르신은 아픈 상처를 가슴속에 묻고 살아왔다. 지난 2003년~2009년 노무현 정부 때 일제 강제징용자 접수를 받을 때도 선뜻 나가지 않았다. 3~4년 전에 아시아태평양전쟁유족회에서 피해자 접수를 하라고 연락이 왔을 때도 "뭐 그럴 필요가 있나"며 나서지 않다가 3년 전 일제피해자배상문제연구소 정상천 이사의 권고로 비로소 강제징용피해자 접수를 하고 일본 전범기업 대상 손해배상 재판에 원고로 이름을 올렸다.  

박동규 어르신은 "그땐 힘없고 멋모르고 끌려가 일했지만, 일본 탄광업체에 받지 못했던 인건비(노임)를 청구할 수 있다니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며 "쉽지는 않을게야. 일본이 어떤 나라야, 우리를 36년동안 지배했던 나라 아닌가. 그래도 우리가 나서고 정부가 힘을 보태서 노력하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체불노임과 관련해 일제피해자배상문제연구소 정상천 이사는 "일제강제징용 체불노임 손해배상 소송 청구자 1004명 중 남해사람이 104명인데 이들을 대상으로 최근에 청구취지를 바꿔서 재판을 청구해 놨다"며 "재판날짜가 안 정해졌지만 현재 대한변협 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재판추진을 진행중이다. 군내에 강제징용자 생존자가 17명이다. 이 분들이 빛을 볼 수 있도록 군민들의 많은 관심 바란다"고 말했다.


이충열 기자  mu0hwa697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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