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중심` 사회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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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중심` 사회의 허와 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17.11.23 14:36
  • 호수 5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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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창선면

전통적으로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기업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기업이 직원들의 생계나 노후를 위해 맡은 바 역할과 책임을 완수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종신고용`의 토대 위에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정년퇴임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처럼 한 직장에 줄곧 머물며 근속 기간에 비례한 직급과 직위를 보장받는 제도가 `연공서열`이다.

그런데 `연공서열`에는 `상명하복`식 관행·업무의 효율성을 저하시키는 적당주의·무사안일주의 같은 제도적 허점이 따른다. 더구나 능력 없이 자리만 차지한 채 부당한 지시를 일삼는 직장 상사야말로 합리적 성향의 청년 세대에게는 반감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한 반작용이 `능력주의`다. `연공서열`과 `능력주의`는 1980년대 사회적 논쟁이 되었다. 그 결과 승진뿐만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당하면서까지 `회사 인간`이 되는 것을 기피하는 심리가 확산되었다. 종전의 수직적인 기업 문화도 수평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능력주의`는 나이나 경력보다 능력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근속 연한에 비례하는 호봉제가 아닌 능력에 따라 임금체계를 달리하는 차등제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부정적 측면이 있다. 개인의 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과도한 경쟁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마도가와족(窓側族)`이 한 예로써, 업무 능력이 뒤처지는 직원의 사무용 책상을 사전 통보 없이 창가로 옮기고 업무에서 소외시킨다. 스스로 알아서 물러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능력이 다소 부족해도 그런대로 묻혀 가던 이전과는 기업 환경이 판이해졌다.

1990년대 문턱에 들어서자 버블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향후 일본 사회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경제 암흑기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동안 일자리의 풍요 속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청년들은 `나이테이`는커녕 고용 불안과 `능력주의`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갔다. 최근 십 년간의 데이터를 보면 `능력주의`보다 `연공서열` 체계를 선호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이테이(內定)`란 대학 졸업반 때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일찌감치 취업을 확정짓는 것을 말한다. 

최근 우리 사회도 `성과주의`에 이어 `능력중심`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정부는 당장 공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시 블라인드 방식을 독려하고 나섰다. 앞으로 입사 희망자의 사진·성별·연령·출신교·출신지 등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 수집이 금지되고, 인성·적성 검사도 배제될 듯하다. 그런데 신입사원의 자격 조건으로 직무능력이 전부는 아니다. 따라서 성실성·청렴성·도덕성·창의성·친화력 등 개인의 자질이나 주관적 가치관을 블라인드 방식으로 어떻게 검증할지가 관건이다. 타당성 있는 정책을 입안하더라도 여론 수렴이나 공론화를 통해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 정책의 실효를 꾀하는 데 한계가 있다. 

대입 제도의 대대적인 개편도 예고된 바 있다. 이 역시 `능력중심`의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과열된 입시경쟁을 완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다만 현시점에서는 변별력을 갖춘 학력평가제도와 공신력 회복을 위한 공정한 경쟁 체제 수립이 우선이다. 수능 절대평가제에 대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비등하자 도입 여부를 일 년 후로 유예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추후라도 수능제도의 졸속 개편으로 인한 학력의 하향평준화나 학업우수생에 대한 역차별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능력중심` 제도가 제대로 운용된다면 기업은 유능한 인재를 통해 경영 효율화를 꾀하고, 직원은 기여도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받는 윈-윈 효과를 기대해 볼 만하다. 한편 우리 사회에는 방만한 경영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떠안기는 부실 공기업이나, 능력도 없고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이른바 신의 직장에서 철밥통 챙기기에 급급한 부도덕한 공직자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능력중심` 사회를 외치기 이전에 사회적 병폐부터 척결해야 한다. 완전무결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제도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로 귀결시킬 수밖에 없다. 제도를 세우는 것도 제도를 무너뜨리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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