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자 씨 이야기,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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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자 씨 이야기,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 전병권 기자
  • 승인 2017.12.17 22:46
  • 호수 5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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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 우수상 쾌거, 수상자 8명 중 유일한 장애인 수상자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가 주최한 이번 공모전은 지난 5일 카톨릭청년회관에서 2017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 ‘삶이 있는 이야기’ 공모전에서 정정자(왼쪽에서 두 번째) 씨가 보건복지부장관 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남해소망의집(시설장 김종은) 거주인 정정자 씨. 이제는 시인이 어울리는 정정자 씨가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가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정자 씨가 소망의집으로 오기 전 시절인 10대부터 지난 9월 열린 시집 출판회 등 그녀의 인생이 담긴 사례 글이 2017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 ‘삶이 있는 이야기’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꼽혔다.

특히 정자 씨는 2위격인 우수상을 수상했지만 실질적으로 8명 중 유일한 장애인 수상자로 그 상의 가치는 최우수상 이상을 지니고 있다.

정자 씨는 “올 한해 행복한 일의 연속이라 어려운 시 공부도 즐겁게 할 수 있다”며 “이렇게 큰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진 않았지만 받고는 싶었다”며 소녀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수상하기까지는 늘 그녀의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소망의집 김종건 사무국장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강범석 사회복무요원이 지도하고 교정과 교열을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가 주최한 이번 공모전은 지난 5일 카톨릭청년회관(서울 마포구)에서 2017년 장애인거주시설 우수사례 ‘삶이 있는 이야기’ 공모전으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장애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총 62편이 접수돼 8편의 우수작이 선정됐다.

한편 “내년에도 올해처럼 행복한 행보를 기대해도 되는지?”라는 질문에 정자 씨는 “우선 시인으로 등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또한 영감을 얻기 위해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올해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내년에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정정자 씨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쓴 이야기다.

 

남해 소망의 집 이용인 정정자

 

마침내 무대에 올랐다. 짝, 짝, 짝.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행사장 안을 가득 메웠다.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을 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응원 소리에 힘입어 열심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박수 소리가 멎고 실내가 조용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첫 문장을 읽었다. “나 다시 산다면…….”

나는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돌이 다 되어도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나를 어머니께서 병원에 데리고 갔고, 수술을 해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죽지 않았지만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일어나 앉을 수도 없고 몸을 뒤집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주로 집에 혼자 남아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은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일을 나간 어머니와 학교에 간 동생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방안에 누워 있었다. 때때로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서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논두렁에 누워서 기어가는 개미를 보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개미에 물려 엉엉 울기라도 하면 지나가던 동네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리곤 했다.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내게는 친구가 없었다.

유일하게 나와 대화를 나누고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는 라디오뿐이었다. 어머니가 농사지은 땅콩을 내다 팔아 사다 주신 것이었다.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때, 라디오를 듣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다.

더불어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린이 채널에서 동요도 듣고, 장애인 방송에서는 다른 장애인 친구들의 삶도 접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문득 글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남들처럼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으면 친구가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지가 생겼다.

동생에게 공책과 연필을 부탁해 본격적으로 글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써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열심히 했다. 동네 아이를 불러서 학교 교과서를 녹음해 반복해 들으면서 학교 공부도 하려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필을 쥔 손이 부르터서 포기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세상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네모난 작은 방 한 칸, 그곳에서 내 열정과 시간은 조금씩 무뎌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동네 교회 집사님이 찾아왔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예수님은 모두 사랑하신다는 말씀에 집사님을 따라 교회에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일요일이 되자 집사님은 리어카를 끌고 나를 데리러 왔다. 휠체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리어카에 누워 울퉁불퉁한 길을 가던 날, 내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갔던 날이었다.

겨우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가는 내내 나는 눈물을 흘렸다. 푸른 하늘, 푸른 들판, 푸른 세상. 집 바깥의 세상은 너무나 푸르러서 아름다웠다. 감격한 사이 교회에 도착했다.

방 한가운데 누워 예배를 드렸다. 그 후로 교회는 내가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주었다. 예배 시간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성숙해갔다.

외로움을 느끼기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만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에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넓은 세상에 나를 맞추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통영에 있는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려 했지만 나이가 많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냈다. 남해소망의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십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나를 힘들게 했다. 장애인 인권이 약했던 때였고 사람들은 장애인을 대하는 것을 낯설어했다. 시장에 나가면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이상하게 쳐다봤고, 어린아이들은 내 모습을 보고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부딪쳐 보았다.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밖을 나가며 끊임없이 나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남해소망의집에서 나는 한층 더 성장했다. 이곳에서 나의 신앙심은 더 깊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보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세상을 용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창문을 열면 바로 산이 보인다. 나는 매일 산과 들로 산책을 다니며 자연과 가까이 지냈다. 길을 다니며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색을 보는 것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내친김에 방에서 콩을 길러보기도 했다.

쑥쑥 자라는 콩을 보면 좋으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식물도 사랑과 정성을 주면 저렇게 자라나는데, 여전히 씨앗으로만 남아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라도 이들을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도 용기를 내어 나아가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생각했던 소통의 통로는 글이었다. 때마침 나는 소망의집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순회특수교육으로서 선생님들이 직접 시설로 찾아와 수업을 해주셨다.

마흔일곱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고, 특수 교육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골 마을이었기에 교육을 받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사무국장님이 직접 발품을 뛰어 장애 학생을 더 구해서 경남도 교육청을 다니시며 얻어낸 결과였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학교 수업을 받으며 나는 정말 기뻤다. 어렵게 얻어낸 기회인 만큼 더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내 첫 선생님은 삼십 대의 젊은 총각 이상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내 눈높이에 맞는 수업을 진행하셨다. 내가 엎드려서 수업을 받으니 선생님도 엎드려서 천천히 입 모양을 보여주시며 글을 가르쳐주었다. 혼나기도 하면서 일 년간 재밌게 공부를 했다.

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수업을 생각하면 설레고 두근대는 마음뿐이었다.

학교 수업에서 문장을 익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하면 옆에서 받아쓰는 수준이었지만 여러 편의 글을 완성했다. 글 쓰는 일에 익숙해질 즈음, 국장님이 시를 써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국장님은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모두는 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정자 씨도 충분히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 같다.

국장님은 일이 끝나고 나서도 시설에 남아 내게 시를 가르쳐주셨다. 시의 기본적인 틀부터 비유법까지 하나하나 짚어주셨다. 나는 시만큼은 내가 직접 쓰고 싶었다. 내용이 짧아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손으로 글을 쓰는 건 힘들어서 나는 컴퓨터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움이 생겼다. 내가 눈이 좋지 않아 모니터 화면과 자판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자판을 큰 것으로 바꾸어 보았다. 글자 하나가 내 손바닥 크기만 한 키보드였다. 그러다 보니 팔을 많이 움직일 수 없는 내가 글자를 입력하기에 오히려 불편했다.

국장님과 나는 다시 오래 고민한 끝에 방법을 바꾸었다. 자판을 일반적인 것으로 교체하고 대신에 모니터 화면의 글자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휘봉 끝에 연필지우개를 달아 휠체어에 앉아서 자판을 쳤다.

이 방법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화면에 가득 차도록 글자 크기를 키워서 이전에 쓴 글을 한눈에 볼 수 없다는 점이 불편했다. 힘겹게 마우스 휠을 올렸다 내리면서 글을 썼다.

처음에는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2~3개월이 넘는 시간이 들었다. 내용을 생각하는 것은 쉬웠으나 직접 쓰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편쯤 시를 쓰자 한 달에 한 편 정도 쓰는 것이 가능해졌다.

첫 시를 완성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는 지금처럼 마음이 행복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시 내용도 밝지만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글로 썼다는 것이 내겐 의미가 깊었다.

글은 내 마음과 설움을 해소할 수 있는 통로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을 글로써 이룰 수 있고, 속에 담긴 말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마음에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이쯤 되자 국장님께서도 뿌듯해하며, “정자 씨, 내가 시집은 못 보내줘도 시집은 꼭 내줄게요.”라고 약속하셨다. 조건이 있었는데, 시 백 편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국장님도 반신반의하며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나는 사 년이 걸려 정말 시 백 두 편을 완성했다.

자연에서 얻은 영감과 소망의집 식구들, 학교에서 간 나들이 등등 시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났다.

완성된 시들을 보며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국장님은 바로 시집 출판 준비에 돌입했다. 시인을 섭외해 전체적인 교정을 부탁하고, 출판에도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우리는 출판 기념회도 열기로 했다. 이 순간들이 십 년 가까이 글을 배우고 노력했던 결실이었으므로 내겐 너무나도 소중했다. 나도 시집 출판회 준비에 동참했다. 초청장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지인과 친구들에게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시집 출판회에서 시 낭송을 해야 해서 낭송할 시를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내게는 다 고르게 소중한 시들이어서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어려웠다. 시를 고르고 나서는 몇 번씩 읽어보며 발음을 교정했다.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연습했다.

가장 설렜던 일은 시집 출판회에서 입을 옷을 사러 갔을 때였다. 아울렛에 가서 블라우스를 보는데 예쁜 옷들이 너무 많았다. 무엇을 입으면 좋을까, 하고 선생님들과 고민하던 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장애가 있다고 바보라고 놀림 받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내게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한 사람으로, 한 여자로, 그리고 시인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다니. 놀랍고 얼떨떨했다.

평생 신발을 사본 적이 없었는데, 이날 특별히 구두를 샀다. 무대에 신발을 벗은 채 오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보석이 박힌 검은 구두였다. 신발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발이 작아 아동화를 신어야 하는데, 구두로 나온 아동화를 찾기가 어려웠다. 신발을 받아 신고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2017년 9월 12일. 시집 출판회가 열렸다. 당일이 되자 설렘보다 긴장이 더 컸다. 사람들이 많이 와 줄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침부터 숟가락질조차 되지 않았다.

미용실에 가서 고데기로 머리를 펴고 사두었던 옷을 차려입었다. 식이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주기 위해 참석했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친구, 십여 년 전 같이 시설을 몰래 빠져나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놀았던 자원봉사 선생님은 물론 남해 군수님과 교육청장님도 찾아와 축하해 주셨다.

내가 짝사랑했던 첫 담임 이상로 선생님도 오셔서 손을 맞잡으며 환영했다. 이상로 선생님은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손을 잡고 추억을 나누었다.

출판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시 낭송이었다. 나는 무대에 올라 시 두 편을 낭송했다. 내가 더듬거리며 시를 읽어나가자 객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아 꾹 참으며 낭송을 이어갔다.

연습한 대로 두 편을 다 읽고 나서 무대를 내려왔다. 객석에 앉은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주셨다.

소망의집에서 인연을 맺은 해외 친구들도 축하 메시지를 영상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정말 기뻤던 시간이었다. 식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오래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 한 명 한 명, 나를 찾아준 모든 사람들과 한 번씩은 사진을 찍었다.

이상로 선생님과도 단둘이 사진을 찍었다. 총각이었던 선생님은 어느덧 중년의 가장이 되어 있었지만 내 고마운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날은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이다. 내 인생의 기념일이며 축제일이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랑과 감동을 내가 살아갈 날 동안 다 헤아려도 셀 수 없을 것 같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음날에는 몸살을 앓았다. 몸이 기운이 없어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는데 기분만은 들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출판회를 가졌던 시간이 마치 꿈인 양 느껴졌다.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꿈’이었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며칠 후, 신문 기사로 소식을 접한 KBS 진주방송국에서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내게 세상을 들려주고, 나를 세상에 내보내준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다니. 벅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리포터가 소망의집으로 찾아왔다.

‘지금은 정보시대’라는 프로그램의 한 코너인 ‘이야기가 있는 삶터’에서 나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30여 분간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내가 꿈을 이루었구나.

그리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어나 아침을 먹고 요즘에는 성경을 쓴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운동을 한다.

얇은 이불을 등에 깔고 누워 혼자서 움직여본다. 동그라미 한 바퀴를 그리는 데 30분이 넘게 걸리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임한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내 오랜 꿈이었기에.

내 나이 쉰다섯. 나는 아직 꿈을 꾼다. 시집을 출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정진해서 한국문인협회에 등단을 하고 싶다. 시를 전공한 선생님과 매주 시 공부를 해서 등단하는 데 부족함 없이 만들 것이다.

글은 소통의 통로이다. 사회와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선이다. 나는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장애인들을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이 갇힌 마음에서 벗어나 사회에 문을 열고 먼저 다가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고 싶었다.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꿈을 찾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담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장애인들의 아픈 마음과 상처를 나누고 싶다. 그들이 세상에 더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싶다.

진저 허튼은 이런 말을 했다. ‘장애는 나의 일부이다. 나는 그것과 화해해야 했다. 그럼으로써 원한, 편견, 증오와 같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 타인의 장애와도 화해했다.’ 몸이 불편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프다고 일어서지 못하는 정지된 마음이 더 큰 장애이다. 나는 지금껏 그래왔듯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편견에 계속 맞서나갈 것이다. 나도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셨다. 사랑과 관심으로 내게 집중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사람으로, 여자로, 시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조금의 관심이다. 피하지 않고 먼저 다가가는 마음이다. 내 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마음을 울렸으면 좋겠다. 비장애인은 편견의 눈에서 벗어나고, 장애인은 나를 보고 희망을 가지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까?

나는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소망의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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