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욕망, 그 허허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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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욕망, 그 허허로움에 대하여
  • 남해타임즈
  • 승인 2018.03.09 17:55
  • 호수 5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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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성적인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증언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최근 이슈로 떠오른 일련의 추행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천박한 민낯이 드러나는 중이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행위가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욕구임을 감안하더라도 파렴치의 극치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이 와중에 가해자를 자처하며 깜짝 등장한 남성이 양심선언을 하는가 싶더니, 당시 상황이 축소 및 은폐되었다는 여성의 폭로가 뒤를 이었다. 여하튼 2차 피해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픔과 치부를 고백한 그녀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부터 선선히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수차 부인한 끝에 마지못해 동의하는 모양새가 대부분인데, 이때도 성희롱·성추행이 아니라 격려와 관심의 표현이었고 성폭행에 대해서도 쌍방 합의였노라 변명한다. 그날 이후로 자신의 삶은 엉망이 됐건만 가해자는 매스컴에 나와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비참했다고 토로하는 피해 여성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수치스러움에 죽음을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라니 그 내적 고통의 깊이를 제3자의 입장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미투(Me too)` 분노는 언제 터져도 터질 시한폭탄이었다. 성을 불순한 것으로 규정한 채 성이란 단어의 발설조차 금기시했던 과거 압제적 정권 아래에서도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말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굣길 학교 근처에 출몰하여 불특정 다수의 여학생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바바리맨이나 주택가 후미진 골목길에서 여성의 신체를 터치한 뒤 낄낄대며 내빼는 악동처럼 남성에 의한 여성 대상의 범죄는 지금껏 쇠퇴한 적이 없다.

성적 일탈 현상이 시대를 관통해 줄기차게 이어지는 배경에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자리한다. 남성권위주의에 편승한, 남성상을 판단하는 하나의 지표이자 상징은 음주량과 여성 편력이다. 문학계만 보더라도 `글로써 말하려면 모든 것을 경험하라`는 식의 그릇된 풍조가 침습한 가운데, 소위 문단 내 권력자라 불리는 소수의 남성 문인들이 비뚤어진 성의식의 신봉자로 전락했다. 이들의 엽기적인 행각은 작품의 표절 못지않은 명백한 반칙임에도 불구하고 비난은 커녕 오히려 묵과되고 찬양돼 왔으니 경천동지할 노릇이다.

솔직히 말해 질척거리는 욕망과 성적 일탈이 특정 남성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극소수에 해당되겠지만 21세기식 자유 부인과 유한마담의 일탈 행위, 여성들의 심각한 노출증과 걸쭉한 농담에 당혹스러울 때도 많다. 만의 하나라도 성범죄 유발의 빌미를 제공하고서 상대방만 탓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인간 종족의 보존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본능에 충실할 뿐이라는 나쁜 남자의 묘한 설득에 끌렸던 여성 역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열린 문화의 선두주자격인 여자 연예인들도 이번 사태를 보며 무언가 느끼고 배우면 좋겠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그녀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피해 신고는커녕 침묵의 카르텔을 굳건히 형성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우월적 지위나 신분을 소유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입을 여는 데는 그간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고 여성에 관대해진 사회적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서일지 모른다. 자발적이 아닌 억압과 강제에 의한 행위는 죄가 아니다. 죄를 물으려면 가해자 그리고 회피와 침묵으로 일관한 주변인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족쇄를 스스로 풀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바란다.

인두겁을 쓴 채 동물적인 감각과 본능에 따라 경거망동했던 남자의 과거를 무조건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초월적 존재뿐이다. 만약 사람에게서 용서를 받으려거든 바윗돌처럼 굳어 버린 그녀 마음이 봄의 흙처럼 풀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새순이 돋을 때까지 진심을 다해 빌고 또 빌어야 한다. 뒤늦게나마 눈곱만큼이라도 피해 여성의 아픔에 공감했다면, 가해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두 번 다시 비겁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남성 본위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고 개탄하는 대신 그녀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이 그나마 속죄의 길이다. `내 몸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끼리 모여 인간의 품격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무슨 낯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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