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법과 위법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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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법과 위법의 경계
  • 남해타임즈
  • 승인 2018.03.22 12:12
  • 호수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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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화
본지 칼럼니스트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의(義)의 단서라고 했다. `수오지심`은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한 언행을 꺼리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수오지심`은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며 `의`는 그런 마음이 안정되어 형성된 덕이라고 얘기한다.

세상을 살면서 윤리의 테두리 안에 어느 정도껏 관념적 존재로 행하여 왔는지 불현듯이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려면 자신을 들여다보아 나의 진심과 사회적 규범이 만날 수 있는 통로에 탁한 것이 섞여 있지 않아야 한다.

행로가 막히고 가려서 통하지 못하거나 시들어 있는 통로라면 말이나 글로써 표현되는 것이 어찌 노력한 흔적일 수 있는가? 주제 넘는 얘기다. 인간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규범은 내면성에 치우친 도덕과 외면성에 치우친 법률의 자각적인 행위에 대한 혼합적 성향을 가진다.

준법과 위법의 경계에서 줄타기 하듯 내 입맛에 맞춰 이리저리로 넘나들면서 도덕과 윤리는 뒷전으로 밀어놓았다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을 가진 사람은 올바름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회적 당위를 외면한 채 보잘 것 없는 이익과 오만한 편리를 앞세웠다면 자신의 잘못에도 몸을 사린다고 비굴하게 절룩거렸던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나?

몸과 마음을 엄정하겠노라 다짐할 사람이 스스로 엄격하고 정중하지 못한다면 어디 비집고 들어가 설 자리가 있겠는가. 내가 쓰는 말과 글은 내 사유의 수준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를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이제껏 남용한 이치나 규범의 언어를 책임지기엔 곤혹스러움이 커 고개가 숙여진다. 감시의 눈초리나 장치가 없는 곳에서도 도덕이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다시 한 번 냉혹히 물어야 되겠다. 준법과 위법의 경계를 자신이 함부로 정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이 준법과 위법의 경계라는 생각을 일고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수많은 사람의 무리에서 오래 버티거나 배겨 낼 수 없는 노릇이다.

필부라 생각하지만 의식의 지배를 도피시킨 저급한 마음 자세라면 부끄럽더라도 용감하게 뜯어 고쳐야한다.

준법이 왜 중요한가? 도덕성이 경쟁력이고 여기에 배어 있는 정의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스스로를 엄격하게 단속해야 함에도 규범조차 의식의 힘으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어찌 정해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라도 엄격한 규범의식을 대충 보아 넘긴다면 가야 할 길의 발걸음을 돌리거나 품었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사람 관계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이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가지만 키운다면 쉬운 바람에도 넘어지고 만다.

지난 시간을 성찰하고 부족한 삶의 밀도를 축적하면서 깊고 단단해져야 할 시점이다.

봄은 시나브로 내리는데 지혜롭게 살지는 못 할지언정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곤혹스런 사유가 심중을 휘감아 돌고 있다. 

하나라도 편벽된 생각이 있으면 맹렬히 성찰하여 엄중하게 단속하는 자기검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려움이나 송구함에 포박된 것을 안다면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된 부끄러움도 알 것이다.

말이나 행위의 규범이 정의로운 것이 되려면 사람 관계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올바른 것이 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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