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여성회 사무국장
본지 칼럼니스트
날마다 감자를 캐고 맛동산과 함께하며 젤리를 매만지다 잠에 든다. 개인 텃밭을 일구거나 동네 점방을 운영하느냐고? 아니, 나는 고양이 두 마리를 모시는 그저 한낱 인간 집사일 뿐이다. (※감자 : 고양이용 화장실 모래와 함께 굳은 둥근 형태의 고양이 소변, ※맛동산 : 마찬가지로 굳은 길쭉한 형태의 고양이 대변, ※젤리 : 고양이 발바닥의 말랑말랑한 살갗 부분)
집사로서의 내 역사는 신파에 가깝다. 20년 전 첫 집사였을 때 모시던 두 주인 냥이는 같이 산지 채 3년이 안 돼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일하느라 몇 달 주인님들을 맡겼던 외삼촌 집에 쥐약을 뿌린 걸 깜빡한 탓이었다. 꽤 충격이 커서 10년이 넘는 동안 온라인 냥이 소식들을 오가며 대리만족하거나, 주변 길냥이들에게 사료를 나누는 낙으로 그럭저럭 견뎠다.
남해에 내려오기 전 다니던 회사 앞마당에서 만나 밥 주며 정을 쌓던 고양이에게 아깽이들이 여럿 태어났다. 어느 날 동료 직원 차에 치어 위급한 상태로 발견된 고등어 등무늬의 한 아깽이를 헐레벌떡 병원에 데려갔다.
횡격막 파열 진단을 내린 수의사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같이할 마음으로 몇 주를 보내는 동안 작은 생명은 놀랍게도 안정을 되찾았다. `고등어`로 이름 짓고 모신 지 벌써 몇 년, 남해에 내려오기로 결정한 뒤 가장 먼저 챙긴 건 약간의 책들과 고양이 살림이 전부였다.
남해의 처음 몇 달은 새 주인님을 모시는 바람에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가 얻은 집의 이전 세입자 커플이 길 가다 진물을 질질 흘리고 아파하는 얼룩냥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집으로 데려왔다며 상태가 좀 나아지거든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 제안했고 얼결에 받아들였다. 겁 많고 예민한 `고등어`님과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두`님은 그렇게 만났고 한참 동안 좁은 방 한 칸 공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밤낮으로 하악하악 불만을 표했다.
두 주인님이 그럭저럭 한 공간에 서로 물들어갈 때까지 성심성의를 다한 이 비루한 집사가 약간의 결실을 맺을랑말랑 하던 무렵, 남해 곳곳의 길냥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고양이에게 거부감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집집마다 드나들며 인간 손길을 `하사받는` 태평한 길냥들이 꼭 한둘씩 있었다.
옆집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사 첫날부터 고양이 같은 걸 도대체 왜 방 안에 들이고 사느냐며 눈살을 찌푸리셨는데, 때때로 생선 요리 후에는 꼭 뼈를 발라 큰 그릇에 모아두고는 주변 냥이들이 오가며 나눠먹도록 놔두시는 거다. (잔반을 처리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인지 아닌지는 고려하지 않기로 한다.) 더 신기한 건 옆집 할머니뿐 아니라 집집마다, 제집 드나들 듯 태평한 고양이들 때문에 뻔뻔스러워 기가 찬다며 쯔쯔, 하시는 분들도 집에 고양이가 들어오면 일단 챙기고 보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아, 이럴 수가, 무심코 흘러온 이 동네가 바로 상상만 하던 고양이 천국이었단 말인가!
경쟁과 배반, 불신이 차고 넘치는 인간 세계의 각박함이 상대적으로 덜한 시골 지역의 공통 문화일까, 아님 남해만의 독특한 생활환경일까, 하루에도 몇 번을 스스로 질문하지만 그 답을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남해의 평화로운 길냥들을 바라보는 동안 늘 어슐러 K. 르귄의 <날고양이들>이 떠오른다. 날개가 달린 채 태어나 인간, 다른 동물들의 눈길, 멸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숨어사는 날고양이들과 그 주변 풍경, 관계에 대한 짧고도 강렬한 이야기.
본능적으로 집단을 이루고 저와 다른 집단을 경계하며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반경과 그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때때로 피를 흘리기도 하는 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섬 특유의 폐쇄성이 뿌리 깊은 남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한낱 집사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내게는 비교적 살진 궁둥이를 들썩들썩 한갓지게 거닐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본체만체하는 저 평화로운 길냥님들이야말로 계속 남해에 살고 싶도록 만드는 `궁서체` 요인임에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