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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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1.31 15:45
  • 호수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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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
창선면
본지 칼럼니스트

민족 고유의 세시풍속 가운데 고향 생각이 많이 나는 때는 아무래도 설 명절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 역시 향수에 젖는다. 고향을 떠나 천리 타향에서 타관바치로 살아온 이력이 짧지 않지만 수구초심을 어쩌랴. 

서울이 지금이야 삐까뻔쩍 세련미가 넘쳐도 예전에는 꽤나 시골스러웠다. 뭐랄까, 어린이 영양제 `원기소` 같은 구수한 정감이 있었다. 높게 친 담장 위에 유리조각까지 박아 둔 몇몇 집을 빼고는 살림살이가 다들 고만고만하여 상대적 빈곤감이 덜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집에서 지짐이라도 지질라치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먼저 담장을 넘고, "거기, 뭐 하우?" 익숙한 말소리를 앞세운 채 넉살맞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영락없이 등장했다.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부리는 날은 동네 얼음가게에서 얼음 한 덩어리와 수박을 샀다. 냉장고 없이도 살아갈 요령이 다 있다. 그날 일찌감치 저녁 밥상을 물린 자리에서 수박 파티가 벌어진다. 네모진 얼음 덩어리에 무명실을 꿴 이불바늘을 꽂고 망치로 바늘귀를 살살 두드리면 실금이 쫙쫙 가면서 잘게 쪼개진다. 커다란 양푼에 숟가락으로 동글하게 파낸 빨간 수박 알맹이와 노란 참외 조각을 담고 물과 미숫가루와 설탕가루를 투척한 뒤 휘리릭 휘저어 얼음 조각을 동동 띄우면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 줄 수박화채 완성이요! 척 봐도 시원하지만 먹어 보면 더 시원하고 달달한 요것 한 대접에 흡족했다. 게다가 쥘부채를 팔락대며 더위와 모기를 세트로 쫓노라면 배도 부르겠다, 어느새 잠이 별처럼 쏟아졌다.

백색전화 한 대로 부자 행세하던 시절에 부족한 게 어디 한둘이랴. 개별 수도조차 없어 공동 수돗물을 마셔야 했으니 태부족인 사회간접자본에 대해 논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헐렁한 도심을 달리는 코로나 택시를 보며 `마이카` 시대를 꿈꾸기도 쉽지 않았다. 청춘 남녀가 연애를 할래도 당연히 애로사항이 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연애편지 대필자가 주변에 한 명쯤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새 의사소통 수단이 삐삐·핸드폰·휴대폰·스마트폰·폴더블폰으로 꾸준히 진화했지만 마음을 나누는 데는 솔직히 편지만 한 게 없다. 1964년 국내 최초로 K사 냉장고가 출시되고, 1970년대 후반에는 드디어 우리 집에도 냉장고를 들였다. 요즘과 달리 앙증맞기 짝이 없는 1도어 냉장고라도 좋기만 했다.

한편 `베이비부머` 세대의 아이들로 북적대는 초·중·고 교실은 학급 당 70명이 넘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다. 변소 개량사업 전인 국민 학교 입학 당시만 해도 황소바람이 숭숭 통하는 낡은 목조의 `푸세식`이라 웬만하면 소변을 참는 버릇이 생겼다. 참고로, 신문이 아닌 구문은 어른 손바닥 크기로 잘라 철사로 꿰어 두고 뒤처리에 사용했다. 

겨울 풍경은 어땠을까. 우선 겨울의 시작점은 조간신문에 연탄가스 중독사고 소식이 올라온 날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나저나 일반 가정의 단열과 난방은 허술하지, 먹을거리는 시원찮지, 옷은 보온성이 떨어지다 보니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실제보다 한참 낮았다. 어쩌면 거리에서 구걸하는 소년의 땟국물 번진 얼굴이 우리의 겨울을 더 썰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눈이라도 내리면 거북이걸음으로 서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도로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로도 차량도 제설작업도 두루 신통찮았던 탓이다. 

겨울은 단연 학교 아이들의 협동심이 발휘되는 계절이다. 난방용 땔감인 조개탄을 나르고, 조개탄 난로 위에 쌓아올린 양은 도시락의 위치를 `위아래, 위위아래` 바꾸는 것 모두 당번들 몫이었다. 돌이켜보면 `사는 기 얼매나 팍팍했던고.` 싶지만, 이 또한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이라면 낭만이다. 좌우당간 대관령 황태덕장의 명태가 겨우내 얼다 녹다 하며 환골탈태하듯, 한강물이 얼다 풀리다 하는 사이 동장군도 제풀에 지쳐 스르르 물러났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겨울이 암만 모질어도 봄이 오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서울역을 기준하여 도시 복판에 자리한 우리 집 문간방에는 일 년 내내 공짜 하숙 손님이 끓었다. 평생 무욕과 나눔을 실천한 선친은 대학 진학이나 취직을 목적으로 상경한 친인척에 지인들까지 살뜰히 거두었다. 부모님과 형제들 거기에 붙박이 객식구들로 왁자하던 고향집이, 그 아스라한 추억들이 못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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