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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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귀환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4.05 11:14
  • 호수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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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겨우내 얼어붙었던 논흙은 진작 다 풀어져 포슬포슬하다. 삭정이처럼만 보이던 나무 가지마다 방싯방싯 새순이 돋고 망울망울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다. 작년 가을걷이 때 고추를 수확하고 희아리를 그러모아 한구석에 밀쳐놓은 밭에도 봄기운이 넘친다. 주택가 한갓진 골목 안쪽에 웅크리고 앉은 고양이 눈가에도 대롱대롱 졸음이 매달렸다. 머지않아 양지바른 길가 둑에서 봄나물을 뜯는 아낙의 등 너머로 어룽어룽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이다. 

겨울의 오랜 침묵 끝에 봄이 다시 스르르 찾아왔다. 겨울이 주는 왠지 모를 공허함과 썰렁함을 견뎌 낸 보람을 만끽하는 중이다. 지난겨울 북풍 한파가 몰아치는 빈 들판에서 살이 에일 것 같은 냉기가 품속을 파고드는 바람에 식겁한 적도 있다. 그리고 겨울 숲속은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또렷이 들릴 만큼 고요했다. 인기척에 흠칫 놀란 장끼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에 숲의 정적이 잠시 깨어진 게 전부다. 그나저나 잔뜩 움츠러든 채 겨울잠에 빠진 숲속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색채에 비유하자면 단연 회색빛이다. 살점 한 점 안 남기고 육질이 모두 사라진 겨울나무의 기골이 여느 계절보다 탄탄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차갑고 쓸쓸한 겨울 이미지가 더해진 듯도 하다.  

그에 반해 봄은 화사한 파스텔 톤이다. 봄은 생명에 대한 외경과 삶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의 계절이다. 천지 사방에서 펼쳐지는 알록달록 봄꽃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푹신한 솜이불 위에라도 누운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부작용이라면 햇살 가득한 풍경 속에 생기발랄한 사람들을 보며 우울증 환자들의 우울감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는 사람들도 해마다 이맘때면 애를 먹는다.

겨울철에 잃어버린 미각도 되찾고 춘곤증도 해소시킬 만한 특별한 음식 처방은 없을까. 봄 향기를 음미하면서 기력을 보충하기에 제격인 계절 음식의 대명사 도다리쑥국이 먼저 떠오른다. 찹쌀 반죽에 진달래 꽃잎을 눌러 기름에 지진 화전 혹은 꽃지지미도 봄을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절식(節食)이다. 찹쌀가루를 익반죽해서 송편 빚듯 모양을 만든 뒤 그 안에 팥소 등을 넣고 기름에 지진 주악 또한 별미다. 계피가루를 뿌린 꿀에 즙청해 두었다가 먹으면 환상적이다. 실내에서 간단히 봄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는 라벤더·로즈메리·딜·카밀레·애플민트·바질 같은 허브 식물을 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봄은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라 농한기를 마친 일손들이 하나둘 농사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본격적인 농사에 앞서 경운기로 밭가는 소리가 들녘에 울려 퍼진다. 흙이 부드러워야 씨앗도 잘 움트고 뿌리도 잘 내린다. 하늘과 맞닿은 인도 `키베`라는 고장에서는 밭을 갈 때 불경을 노래로 부른다. 쟁기에 치여 죽는 벌레를 위한 진혼곡인 셈이다. 우리에게도 노동요를 부르며 농사짓던 시절이 있었건만 좋은 풍습이 자꾸 사라지니 아쉽다.

다음 달이면 조용하던 바닷가 포구 역시 시끌벅적해진다. 그물 어구로 포획한 멸치를 배에 싣고 포구로 돌아오는 즉시 그물에서 멸치를 떼어내는 멸치털이 작업 때문이다. 어부들의 일사불란한 동작과 구호에 맞춰 은빛의 작은 생명체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진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설렌다. 바다의 싱싱함을 품은 멸치 요리가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지면 상춘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일도 아니겠다. 품질은 이미 인정받았고 남은 과제는 풍어와 어부들의 안전이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여 계절은 오고간다. 곰곰 생각할수록 사계절 가운데 봄이 포함되어 있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봄은 삶에 지친 우리를 위해 자연이 내준 특별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따사로운 햇살이 유혹하는 이 봄날, 물색 고운 옷을 차려입고 어디론가 꽃구경이라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면 지금 당장 심간에 불을 질러 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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