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에 스며든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자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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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에 스며든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자취를 만나다
  • 김수연
  • 승인 2019.04.11 16:54
  • 호수 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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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남해종친회 문장 95세 김석원 선생 개인역사박물관 개관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 소암 김석원 선생.

경주김씨 남해종친회 문장(門長)인 소암 김석원(95·이동면 고모) 선생이 지난 5일 소암정사(素庵靜舍)라는 개인역사박물관을 열었다. 소암정사에는 선생의 개인 소장품과 사진, 친필서예와 공로패 등 각종 상패가 진열돼 있다. 집 한 켠의 창고를 개조해 지은 개인 역사관이지만 결코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한 개인의 내력에 바로 우리 근현대사가 켜켜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석원 선생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마련한 이 공간에는 근 100년의 우리 역사가 개인의 삶으로 드러난다.

 소암 선생은 고조부 때부터 5대에 걸쳐 고모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지금 거주하는 집만 해도 100년이 넘었다. 선생은 부인 박금엽(94) 씨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자손들은 현재 부산에 거주하고 노부부만 고모마을에 산다.

 

사회활동, 문중활동, 유품수집 단계별 정리

 소암 선생은 "기록은 별로 없지만 나의 일생을 세 단계로 나누어 정리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던 시기다. 소암정사에 있는 많은 소장품들이 젊은 시절 선생이 생활해온 모습을 말해준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상장, 감사패, 위촉장 등이 내가 사회활동을 한 흔적이다. 1987년 지역의료보험이 설치될 때 부산시 의료보험공단 이사를 역임하고 부산시 시정 홍보위원도 했다.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에게 받은 감사패, 또 부산시장과 역대 구청장에게 받은 공로패, 위촉장 들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선생이 73세 되던 1997년 4월 9일,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남해로 돌아온 뒤 문중을 위해 활동했던 기간이다. 선생은 귀향하면서 "사회생활은 접고 경주김씨 64세손으로서 이제는 조상을 받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2년부터 대정리 남산 평지에 문중 납골묘 350기로 이루어진 대형 납골평장묘지를 조성해 2004년 말에 준공했다. 현재 남해 곳곳과 삼천포, 밀양 등지에 흩어져 있던 조상 묘 94기를 비롯해 문중 사람들의 납골묘 350위를 모셨다. 이렇게 남해군 장묘문화개선에 앞장섰다.

 "이 64세손이 당시 서면 서호에 있던 480년 된 입남조 할아버지의 묘를 파묘해서 화장한 다음 그 위의 아버지, 할아버지 묘까지 전부 18위를 남산에 평장했다. 매장문화를 화장문화로 바꾸려고 한자리에 모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소암 선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흔적을 죽은 후에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고 유품을 모아온 작업 기간이다. 선생은 "자랑으로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교육자료로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소암정사 내부 한쪽 벽에는 선생의 가족사진과 선생이 직접 쓴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사진) 맨 왼쪽 글은 독립애국지사 안중근 의사의 옥중시를 선생이 옮겨 적었다. 그 옆의 두 작품은 반야심경을 적은 것이다. 이렇게 반야심경 50여 부를 자필로 써서 속세의 부처님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액자까지 직접 해서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소암정사 한쪽 벽에 각종 사징, 친필서예작품이 걸려 있다.

6·25전쟁, 고도성장기 다 겪어

 선생은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어린 시절에 일본인 밑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공부했다. 1944년 8월 1일에는 일본해군에 입대해서 요코스카 군함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무장해제하고 한국 군인들과 함께 해방 후 첫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6·25전쟁 때는 사람들이 잡혀가서 많이 죽었다. "그때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리라 마음먹었던 것 같다. 이 집에서 6·25때 다섯 가구가 숨어서 지냈고 목숨을 구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생명의 은인이라며 고마워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전쟁 뒤 옥고도 치렀다. 당시 고등군법32조에 따라 이적행위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5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일이 해운 사업이다. 남해 농산물을 배에 싣고 가 부산에서 판 다음 국제시장에서 생필품 등을 사다가 남해에 들여왔다. 당시에 종업원 40여 명을 두고 있었으니 큰 기업이었던 셈이다. 그 일을 23년간 했다. 1967년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는 돈이 없어 지붕 개량을 못하던 양아, 상주 사람들에게 슬레이트 지붕을 이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1973년 남해대교가 준공되면서 해운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배를 팔고 해운사업을 접었다. 1984년부터 1997년까지 13년을 부산에서 살면서 의료보험공단 이사, 시정 홍보위원 등을 역임했다.

 

삼라만상은 주고받는 것, 옥석처럼 둥글게 살라

 "재산을 모으는 건 자기호강일 뿐이다. 하지만 자손을 키우면 자손대대로 내려갈 수 있다. 돈보다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사람을 키우면 재산은 절로 따라온다."

 소암 선생은 "온 세계 삼라만상은 서로 주고받는 역할이지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저 높은 태양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둥근 경주옥석을 40년 정도 소장해왔다. 모가 나면 죄가 된다고 믿는 그는 둥근 옥석 같은 삶을 살아왔다.

 "소암 어르신이야말로 살아있는 한국현대사다. 특히 김두관 군수 시절부터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는 등 많은 이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개관식에 참석한 정현태 전 남해군수의 말이다. 김수연 기자 nh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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