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 달빛이 내리는 플랫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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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 달빛이 내리는 플랫폼에서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4.18 19:18
  • 호수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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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재 본지 칼럼니스트
장  현  재
칼럼니스트

도로가 발달한 지금도 길을 가다 만나게 되는 철길과 기차는 여전히 콩닥거림을 더하고 간이역은 청춘의 로망을 돌아보게 한다. 기차역 그곳은 언제나 두 얼굴로 다가선다.
삼월의 마지막 봄날 어디를 가나 기화요초에 탐화봉접인데 싸늘한 하현 달빛이 쏟아지는 순천역 광장은 현란한 엘이디(LED) 조명 속에서도 서리 베고 누운 겨울 들판처럼 허전하다. 만남의 두근거림에 앞서 지난날 스민 기차역의 추억이 아닐까?
이십여 년 만에 찾은 순천역은 많이 바뀌었다. 고속철도 개통으로 전라선은 복선화되고 역사는 새롭게 단장하여 지방의 작은 공항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자아낸다. 대합실로 들어선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는 조명이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것 같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가려고 입장권 사는 곳을 찾지만 철문으로 만든 개찰구도 검표기를 든 역무원도 없다. 경험의 중단이 자유로운 출입의 현실을 망각하게 했다. 
플랫폼으로 향하는 2층 통로를 지나며 잠시 철길을 굽어본다. 레일은 약한 달빛과 플랫폼을 밝히는 조명으로 어둠속에서 빛난다. 상행선 하행선 네 줄의 레일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품고 그 사연은 쌓여 침목을 받쳐주는 자갈이 되었으리라. 한 계단 두 계단 에스컬레이터가 있지만 발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플랫폼으로 내려온다. 기차 도착 시각이 20여 분 남아서인지 플랫폼엔 한기가 가시지 않은 봄바람만 주춤거린다. 간혹 화물을 실은 기관차의 힘겨운 소리와 선로 이음새에 부딪히는 바퀴의 마찰음이 정적을 가른다. 어디를 향하는 걸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일 위의 움직임은 언제나 미지의 동경을 불러온다.
플랫폼의 노란 선에 서서 철길을 본다. 같은 길이와 일정한 간격의 선로들이 시멘트 침목을 베고 평행선으로 릴레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둠의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아마 그 소실점을 찾아 나서면 또 다른 소실점이 나타날 것이다. 소실점을 찾는 모습은 오늘의 팍팍한 현실을 이겨내며 무지개를 찾는 우리 삶의 모습이리라. 
맞은편 플랫폼에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는 인파가 늘어난다. 상행선 기차는 2분 남짓 정차 후 바퀴의 마찰음을 라르고에서 프레스토로 울리며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그렇다. 역, 터미널, 공항, 인생, 생명 모든 것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며 반복된다.
만남의 기다림이란 짧은 시간을 보내며 기차에 대한 계절의 기억들이 아날로그 환영으로 일어선다. 이맘쯤 타는 기차는 꽃 터널을 달린다. 대학 시절 사월 초 서울행 기차에 꽃바람을 실은 일이 있었다. 철길 따라 북상하는 봄 향기는 경부선 동대구역을 벗어날 즈음 개나리꽃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기차가 스칠 때마다 차창밖엔 노랑 파도가 일렁이고 간이역엔 벚꽃이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그 사라진 환영은 마치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에 나오는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처럼 봄만 되면 아리게 되살아난다. 
장마가 끝난 팔월의 기차역과 철길은 어떠한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달구어진 레일과 자갈들은 기찻길 특유의 지린내를 뿜어냈다. 단선으로 운행되는 기차를 타면 비둘기나 통일호는 무궁화나 새마을호에 진로를 양보해야 하기에 간이역에 머물 때가 있다. 잠깐의 기다림이지만 코스모스를 닮은 금계국이 늘어선 간이역은 머지않아 높아질 파란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왔다. 
가을날 시월의 기차는 아쉬움을 주었다. 마지막 완행열차인 비둘기호가 2000년에 사라진 후 서너 량을 연결한 무궁화호를 타고 아이들과 같이 진주에서 하동까지 간이역을 스치는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어린 호기심과 들뜬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황금들판의 일렁임을 가로지르는 기차는 마치 우주를 누비는 은하철도 999호의 주인공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경전선도 복선화되어 그 시절 아쉬움은 폐선으로 된 레일 위로 스며있다.
기차를 많이 이용하였지만 겨울 기차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성탄절을 앞둔 야간열차에 실은 몸은 성에꽃 핀 창가의 어둠 속에 묻힌다. 땡땡땡 건널목을 지나칠 때마다 경보음과 빛나는 교회의 빨간 십자가와 전등 트리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읊조리게 했다. 그렇게 꾸벅꾸벅 졸며 새벽을 맞은 기억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란 정경에 이입되어 겨울여행 침묵의 의미를 일으킨다.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은 소중하다. 다시 기차가 도착하니 노란 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안내방송이 플랫폼의 정적을 깨운다. 어둠의 소실점에 한 줄기 빛이 크게 다가선다. 날렵한 몸매의 기차는 반가움을 쏟아내고 움직인다. 그리고 수채화 같은 지난 회상은 봄바람에 나부끼어 레일 위로 흩어지고 아스라이 떠나버린 해후의 조각들은 긴 여운을 남긴 후미등 불빛처럼 가슴에 꽂힌다. 
여기 온 목적이 무엇이었지? 현실을 가다듬는다. 평행선으로 달리는 철길, 만남과 헤어짐이 묻어나는 기차역은 우리 삶의 여정과 같다. 삶에 있어 생명체는 환희와 아쉬움을 안고 가는 평행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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