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살아 계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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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살아 계실 때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5.10 11:27
  • 호수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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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칼럼|이현숙
이 현 숙
칼럼니스트

흔히 인생길이라 하면 구곡양장의 험로가 연상된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사는 세월이나 누군가의 부모로 사는 세월 모두 만만치 않아서다. 갖은 고생 끝에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다 싶으면 몸에 탈이 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니면 어느덧 인생 내리막이다.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으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서 겉모습은 남루해져만 간다. 이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 주는 부모가 곁에 있다면 이보다 든든한 언덕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자식을 위해 존재한다. 자녀가 잘 되기만을 빌며 일생 동안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슨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다. 아낌없이 퍼주고도 미안한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런데 부모 역시 인간이기에 가끔은 자식의 위로에 목마르다. 그래봤자 바라는 것은 안부 전화 한 통 아니면 얼굴 마주보며 나누는 한 끼 식사다. 하지만 그 소박한 기대마저 외면당하고 나면 왠지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자식들도 부모의 심정을 모르지 않기에 한집에 모시고 정성껏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그러나 실상은 떨어져 사는 부모의 안부 확인조차 태만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자신 역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바쁘고 힘든 것만은 틀림없다.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을 건사하면서 정작 본인은 변변한 노후 대책이 없는 중년의 `낀 세대`의 애환은 더하다.
아무튼 먹고 사는 데 급급해 부모를 챙길 여력이 없을 뿐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게 자식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전 세대의 어머니들을 돌아보면 어쩌면 그것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혼자 힘으로 여러 명의 자식을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식은 아무리 많아도 어머니 한 분을 모시기가 쉽지 않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부모의 시간을 생각할 때 더 이상의 변명은 훗날의 후회거리만 될 듯하다.
한집에 기거하지 않아도 전화 수화기 저편에 부모가 살아 계신 자식은 행복한 편이다. 그러니 날로 쇠잔해지는 부모가 아주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되도록 고향집 문턱을 자주 밟아야 한다. 특히 어머니가 홀로 계시다면 얼굴을 더 자주 보여 드리고 목소리도 더 자주 들려 드리는 것이 좋겠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고향도 고향이 아니다. 
부모를 이미 여읜 경험이 있는 자식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알 터이고, 운 좋게 부모가 생존하더라도 이별의 시간은 그리 머지않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부모의 손을 놓아 드릴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뉘라서 그 길을 피할 수 있으랴.
공자께서도 `부모의 연세는 알아 두지 않을 수 없으니 한편으로는 기쁨이요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라 했다. 부모와 함께한 시간을 돌이켜보라. 한 무더기의 장작을 그러모아 지핀 화톳불이 사그라지기까지의 시간만큼이나 짧다고 느껴지지 않던가.
효행을 실천하고자 한들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부모를 봉양하고 싶어도 부모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운 마음으로 행할 일이다. 조선 시대 가사문학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송강 정철은 이런 심정을 다음의 시조에 담아 후세에 전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말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런데 왠지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라 지레짐작하고 실천은 마냥 굼뜨다. 진심어린 감사의 한 마디를 듣고 부모가 환하게 웃으셨다면 그 또한 효인 것이다. 효심은 책으로 배워 얻어지지 않는다. 부모에 대한 공경심과 감사의 마음만 있다면 그에 따른 행동과 실천은 자연스레 우러나리라 본다. 부모가 언제까지나 그대 곁에 함께하리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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