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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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여인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5.31 11:29
  • 호수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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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숨비소리

푸에르토리코는 대서양의 카리브 해에 위치한 인구 300만 정도의 작은 섬나라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거기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뒤로 손이 묶인 전라에 가까운 늙은 노인이 상당히 유혹적인 색깔의 붉은 드레스를 입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풍만한 젊은 여인의 젖가슴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만으로 다가오는 감성은 누구에게나 에로틱한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하필이면 `왜 이런 그림을 국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스토리를 가미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검정수의를 걸친 노인은 풍만한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는데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음식물 투입금지"라는 아사 형을 선고해 굶어 죽는 형벌을 내렸다. 
노인은 감옥 속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딸은 아이를 낳은 지 며칠 지나 아버지의 임종이라도 보기 위해 감옥을 찾았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를 위해 부끄러움을 뒤로한 채 젖가슴을 풀어 아버지의 입에 물리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이라고 설명한다.
`노인과 여인`의 그림에 깃든 사연을 몰랐을 때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림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면 명화라고 찬사를 보내며 눈물을 글썽이며 감상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그렇지만 본질이 진실로 다가왔을 때는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이 그림이 좋은 예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실 이 그림은 고대 로마시대의 작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룗기억할 만한 언행들룘이란 책에 나오는 `자식 된 도리`에 관한 내용을 1630년에 바로크시대의 유명한 화가 루벤스가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노인은 시몬이고, 딸은 페로다. 그래서 제목도 `로마인의 자비`라고 했으며, 부제로는 `시몬과 페로`라고도 한다. 그리고 소장처도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는 레이크스 국립미술관이다. 누군가 잘못된 정보를 생산해 역사를 왜곡해 국가주의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사기극이 아닌지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존재했던 사건이다. 아무리 꾸미려 해도 해당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 단지 왜곡만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루벤스의 그림이고, 대단한 수준의 명화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왜곡을 얼마만큼 걷어내느냐 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지평을 열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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