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남해군향우회 결성부터 함께 한 곽영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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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결성부터 함께 한 곽영우 고문
  • 하혜경 서울주재기자
  • 승인 2019.05.31 12:11
  • 호수 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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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60주년 기념 인터뷰 1 |곽영우 고문

해는 재경남해군향우회가 결성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59년 5월 출범한 재경남해군향우회가 벌써 회갑을 맞이한 것이다. 60년을 헤아리는 60갑자는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가 순서대로 맞물려 돌아가며 해를 세는 동양식 셈법이다. 60진법의 대표적인 예는 `회갑`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60년이 지나면 태어난 해의 간지로 되돌아 와 61세 생일을 `회갑`이라 부르며 큰 잔치를 벌였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사람도 그럴진대 사람들이 모여 만든 향우회의 회갑은 더욱 의미가 크지 않을까?  60년 전 5월 어느 날 남해사람들이 모여 재경 향우회를 만들기로 뜻을 모은 날로부터 60갑자가 한 번 지났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몇 남아있지 않다. 38년생 남해읍 출신 곽영우 고문이 아마도 유일할 것이다. 역사적 그 현장을 기억하고 있는 곽영우 고문을 만나 재경남해군 향우회 창립과 초창기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59년 5월 덕수궁에서 시작된 재경향우회
60년 전, 대학생이었던 곽 고문은 재경 학우회 임원이었다. 학우회란 서울로 공부나 온 남해출신 학생들의 모임으로 재경향우회보다 빨리 결성됐다. 곽 고문은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들이 학우회를 했는데 청년들끼리 서로 친목도 다지고 여름방학에는 고향에서 체육대회도 진행하며 서로 교류한 단체"라고 말한다.
"4월에 학우회 총회를 준비하면서 선배들에게 인사하려 다니다가 향우회가 결성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향우회에 참석하면 선배들을 많이 알 수 있어 학우회 기금 모금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참석했다. 모이는 장소는 덕수궁이었는데 창립총회 열리기 며칠 전 비가 와서 덕수궁 앞마당이 촉촉했다. 거기에 고향 분 한 20여명이 모여서 삼동 고잔 출신 최봉모 어른을 초대 향우회장으로 추대했다"
지금은 30만 재경 향우들을 대표하는 향우회, 그 출발은 이렇게 소박했다. 초대 회장을 맡은 최봉모 어른은 삼동면 고잔마을 출신으로 명동에서 큰 음식점을 운영하던 어르신이었다. "첫 모임에 모인 사람들 중 읍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거의 면지역 사람들이었다. 고향사람들 모여 향우회라는 걸 한 번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조촐한 모임이었다"고 곽영우 고문은 회상했다.

초기 향우회, 일년에 1회 야유회 진행
최봉모 초대회장 다음 체신부 공무원 출신 최익명 향우가 향우회장직을 물려받았다. 공직자였던 2대 최익명 회장 시절엔 오히려 모임이 뜸했다. 그러다 향우회 재기를 위해 남면출신 김종길 회장이 추대됐다.
"본인은 사양을 했지만 십시일반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서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 당시 상주분이 동대문에서 카바레를 운영했는데 그가 장소를 제공해 주면 오전에 총회하고 도시락 먹고 여흥 즐기는 것이 향우회 행사였다."
그 후 회장을 맡은 분은 고현 출신 정영섭 회장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남해인으로서는 드물게 큰 기업체를 운영 중이었는데 바로 연탄을 제조하는 동진탄광이었다. 1970년대 연탄은 생활필수품이었으니 자금력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곽영우 고문은 "정영섭 회장님은 꿈이 있는 분이었다. 이분은 나를 참 좋아해서 고향사람 40여명이 함께 21친목회를 했다. 매년 2월 1일 만나는 모임이었다. 이 분이 향우회장을 제안 받고 어느 날 나를 불러 `향우회장을 맡으면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내가 그 때 체육대회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재경남해군향우회 화합의 상징인 체육대회가 탄생한 것이다. 체육대회를 제안했으니 매년 체육대회 운영위원장은 곽영우 고문이 도맡아 진행했다. 첫 대회는 1977년 봄에 열렸고 정영섭 회장 임기 4년 동안은 매년 진행됐다.
"군향우회 체육대회를 진행한 덕분에 각 읍면 향우회가 결성될 수 있었다. 체육대회를 하면 면 대표선수를 뽑아야 하는데 면 향우회가 없으면 선수선발이 안되니까 면 향우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군 향우회 회관 건립, 역사를 쓰다
정영섭 회장 임기동안 매년 진행되던 체육대회는 다음 회장인 박문갑 회장님 시대엔 선릉에서 야유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대체됐다가 신동춘 회장 시대를 맞았다. 신 회장 임기 중 군 향우회 60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업이 진행됐다. 바로 군향우회 사무실 건립이다. 사무실도 없이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안타까움은 느낀 향우들이 기금을 마련하고 나섰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도한 향우가 바로 국민은행장을 지낸 김욱태 향우였다.
"향우회관 건립 계획을 세우고 향우 중에 재력이 있는 분들 명단 가져오라 해서 내가 명단을  뽑아서 갖다 주었다. 김욱태 행장님 본인이 먼저 100만원을 내시고 일일이 전화해서 모금운동을 진행했다. 민속촌 정영삼 씨, 유광사 산부인과 원장 등 재경 향우 30여명이 기금마련에 동참해서 약 4800만원을 주고 현재 군향우회 사무실로 사용하는 오피스텔을 분양받았다." 사무실 마련에 가장 많은 기금을 출연한 향우는 민속촌 정영삼씨였지만 실질적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추진한 사람은 바로 김욱태 전 국민은행행장이었던 것이다.

향우회 이름으로 등기된 `고려아카데미텔 1719호`
마포구 도화동 고려아카데미텔 2차 1719호. 소유주 `재경남해군향우회`. 향우회 명의로 등기가 돼 30년 세월동안 남해향우회의 보금자리가 된 군향우회 사무실. 향우회 사무실이 만들어진 후 잠시 임대를 주어 그 수익으로 향우회를 운영한 적도 있었지만 강창호 회장이 임대보증금을 반환해 주고 다시 사무실로 복구한 후 20년 넘게 군 향우회 사무실로 운영 중이다.
곽 고문은 "군 향우회 60년 세월을 돌아봤을 때 가장 큰 역사는 군향우회 사무실을 마련한 것이고 그 일의 중심에 김욱태 전 행장이 계신다. 남해인들로서는 그 분께 큰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말했다.
향우회의 앞날이 지난 60년의 영광을 다시 되찾을 수 없겠지만 60년 전 `고향사람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며 찾아간 남해사람들의 그 첫 마음. 세월이 지났지만 향우회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그 첫 마음이 남아있다면 향우회가 가진 따스함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고향 사람 만나면 좋지. 체육대회 때 싸우고 다시 안 볼 것처럼 해도 또 기를 쓰고 이기려고 하고 그러면서 세상 살아갈 힘을 얻는 거다." 곽 고문의 한 마디가 긴 여운을 남겼다. 

       하혜경 서울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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