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출하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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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출하의 추억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7.19 11:19
  • 호수 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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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강낭콩 수확기인 요즘 새삼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그때 이곳으로 이주하고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도시인도 농촌인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밭 한 뙈기를 손에 넣은 것을 계기로 `시골 사는 도시인` 딱지를 겨우 떼었다.
그 뒤로 달력에 표시된 절기를 짚어 가며 부지런히 흙을 일구고 강낭콩 종자와 고구마 모종을 심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아예 대놓고 밭으로 출근을 하니 동네에서 이야깃거리가 될 만도 했다. 우리 얼굴만 보면 도대체 뭔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궁금하신 어르신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리고 말끄트머리는 늘 `집에서 먹어 봤자 얼마나 먹겠느냐, 남는 뽄디(강낭콩)는 농협에 수매하라`는 충고로 마무리되었다. 애초 텃밭농사를 계획할 때는 우리 손으로 직접 기른 푸성귀 몇 가지로 식탁을 채우는 것이 목표였지만, `폴아라(팔아라)`는 유혹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수확 시기가 다가오니 초록색 강낭콩 껍질은 하루가 다르게 빛깔이 변해 갔다. 드디어 소고기 꽃등심의 마블링처럼 핑크빛과 흰색이 선명한 빛을 발하는 수확 적기가 되었다. 때를 안 놓치려고 꼬박 이틀을 매달려 수확을 마쳤다. 기왕이면 최고로 신선한 상태에서 출하할 욕심에 즉시 선별작업에 돌입했다. 하나하나 요리조리 살피며 바늘귀만큼의 흠집만 보여도 가차 없이 추려내다 보니 전체 중 반의반 건지기도 어려웠다.
그 사이 모기에게 열댓 방쯤 뜯기고 집안으로 쫓겨 들어와 거실에 돗자리를 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다시 선별작업이 시작되었다. 무아지경 속에서 자정이 넘어갈 무렵, 정적을 깨뜨리며 남편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종자할 놈 좀 따로 추려 놔." 헐, 농사일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네 그려.
이튿날 아침 해가 밝았다. 정량 10킬로에 2킬로의 인심을 더 얹어 터질 듯 빵빵한 강낭콩 두 자루를 차에 싣고 남편과 함께 농협공판장으로 향했다. 머리에 털 나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자못 가슴이 뛰었다. 공판장 너른 마당에는 이미 관내 농가로부터 실려 온 강낭콩 자루가 열 지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중개인 13명이 농가에서 출하되는 강낭콩 전량을 매집하여 도시로 출하한다는 말을 담당자가 들려주었다.
열병식이라도 하듯 공판장 마당을 한 바퀴 쭉 둘러보고 나니, 등급 판정이고 뭐고 우리 애들은 무조건 1등급이라는 확신이 섰다. 저녁 무렵 휴대전화를 살피던 남편이 1등급 2자루 사만구백 원이 통장으로 입금됐다고 했다. 예상했던 등급 판정을 받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어 흐뭇했다. 그래 봤자 여름 땡볕에 구슬땀 서 말은 족히 흘린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헐한 가격이다. 어쨌거나 생애 최초로 농산물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기른 강낭콩이 도시 어느 가정의 밥상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수매 당일에 대금을 정산하는 방식도 꽤 흥미로웠다.
강낭콩 판매대금이 통장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땡볕 아래 잡초와의 씨름은 기본이고 예상 외로 많은 품이 들어갔다. 수확기가 하필 장마철과 겹치는 바람에 애도 많이 끓였다. 게다가 난생 처음 하는 육체노동에 허리는 끊어질 듯하고 팔과 어깨도 고장이 나서 앉으나 서나 누우나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이 정도는 행복한 투정이다. 농부가 백방으로 애쓴들 수확기에 내리 비라도 내리면 한해 농사는 끝장이니까. 농사는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라 하늘의 도움 없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밭일은 분명 고되다. 그런데 묘한 것이 흙과 씨름하다 보면 마음은 텅 빈 듯 고요해지고 머릿속은 단순명료해진다. 먹을거리를 기르는 창조적인 행위인지라 보람도 제법 크다.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 여물어 가는 녀석들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콩 한 쪽 팥 한 알에도 바람 소리·새 소리·햇살 내음·밭주인의 인생 이야기가 담길 수밖에 없다. 다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이 궁극의 즐거움마저 없었다면 오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벌자고 그 고생을 사서 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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