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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 새 도시계획, 옛 읍성이 최대 변수다전문가 "군청, 남해초 부지 읍성 관련 유물 발굴 가능성 높다"
전병권 기자 | 승인2019.08.12 11:28|(658호)

남해읍성 이야기 ①

2008년 남해읍 북변리 동백예식장과 효성그린빌라를 잇는 도시계획도로(시장아랫길과 같은 방향, 이하 북변도시계획도로) 공사 중 남해읍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발견됐다. 군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이를 문화재청에 신고하고 지휘를 받았다. 문화재청이 이 성벽에 대한 입장을 정하면 그에 따라 도로공사가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주민공청회에서는 성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9년 남해읍은 군청사 신축부지 결정과 남해초등학교 개축(정밀안전진단 E등급 판정), 도시재생뉴딜사업 등 남해군의 백년대계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에 놓여있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남해읍 북변·남변·서변리 일원에 해당하고 넓은 면적을 차지했던 남해읍성이다. 앞으로 도로공사나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다 읍성터나 문화재가 발굴되면 정밀검사를 실시해야 하며 사업이나 공사 진행에 차질이 생기기 쉽다. 이에  남해읍성과 관련한 정밀검사를 사전에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전문가들을 만나봤다.
이번 기사를 위해 최헌섭 (재)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줬고, 이호열 부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권순강 우리문화재연구원 건축고고팀장의 논문들과 참고문헌들을 통해 남해읍성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이 지도는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남해읍 고지도와 현재 남해읍 지도를 비교해 편집한 모습이다.

시간을 거슬러
 현재 북변·남변·서변리 일원에 해당하는 남해읍성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남해군 최초의 읍성(읍치)은 화금현산성(현 고현산성, 개축 시기 불명확)이었다. 하지만 땅이 좁고 경사지다는 이유로 조선시대(세종 21년) 1439년 11월에 지금의 자리에 축조하게 됐다. 또 남해군은 남해대교 건설 이전까지 육지로 이동려면 수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소항이 요충지였다. 선소항은 유통과 육지로 가는 유일한 통로라는 점과 창선해협을 넓게 바로 볼 수 있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용이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소항의 위치가 당시 읍성 위치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다. 이는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비교적 적은 1000명 규모이지만 일본군이 선소왜성(남해왜성)을 세운 기록과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남해읍성은 임진왜란(1592년 발발) 이후 파손된 개축하고, 1757년 9월 조세술(趙世述) 현령(현 지방 관리를 일컫는 말)의 주도로 개축했다.
 남해읍성이 들어서는 이유는 토지가 비옥하고 일본과 가까운 터라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대비책으로 마련됐다. 하지만 입지조건을 따져보면 보통의 읍성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한편 다른 지역의 읍성과 비교해보면,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인 남해읍성은 성내 시설과 방어병력이 왜구로부터 노출되기 쉬운 구조를 이루고 있어 방어기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즉 왜구침략의 방어기능보다는 백성들 생활의 편의기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공간구성
 읍성 관련 시설은 크게 공해(관청)와 단묘(壇廟: 제단과 사당), 창고로 구성돼 있고 남해군의 경우 향교와 남해의 항구 선소(船所)가 있는데 주목해야 할 곳은 객사와 동헌, 바닥에서부터 여장 아래 미석(眉石)까지의 성벽을 말하는 체성이다.
 남해군고지도와 지적원도를 비교하면, 객사는 북변리 158번지 현 읍행정복지센터 부지에 해당하고, 읍성 내 객사인 남해관에는 주변루(籌邊樓)라는 부속 누각이 북변리 149번지로 추정된다. 또 동헌(조선시대 지방 관서 중심 건물)인 진여헌은 서변리 24번지에 해당한다.
 체성은 정사각형 형태로 한 변의 길이는 평균 약 330m로, 고지적원도상에서 성(城)으로 표기돼 있다. 그래서 남해읍성의 둘레는 체성(성문 포함)의 경우에는 1291m이고, 옹성(甕城: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과 치(雉: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찰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를 포함할 경우, 체성외곽 둘레는 1591m로 기록돼 있다.
 단묘인 사직단은 남산 서쪽에 묘사돼 있고, 창고나 시장(북변리 125번지), 급·배수시설(우물: 서변리 36·49번지, 북변리 97·94번지)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최헌섭 (재)두류문화연구원 원장과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은 "2008·2009년 (재)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읍성 축성과 개축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인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읍성지를 조사하면 초축과 개축시기와 관련 있는 유구·유물이 많이 나온다"며 "남해군청이나 남해초 부지에는 읍성 관련 유물이나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전병권 기자  nh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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