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전가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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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전가사변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8.23 14:07
  • 호수 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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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차덕구 일가가 남해에 유배 온 것은 아홉 달 전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던 정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고 싶어 온 일도 아니었고, 딱히 등을 떠밀던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관아의 형방이 나와 옆 마을 소식 전하듯 던져준 기별을 듣고 부리나케 짐을 꾸려야 했다. 귀신이 무심결에 던져버린 돌처럼 그들은 생면부지의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렇게 아홉 달이 지난 구월하고도 하순 무렵의 밤에 네 식구는 오늘도 모여 앉아 끼니를 때웠다.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도 아닌, 선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갯가 초가집 비좁은 방에 따개비처럼 모여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가끔 아들놈 차상두가 늦어 자리를 비우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한 마디 말없이 밥그릇만 뚫어져라 꼬나보는 중이었다.
밥이라 봤자 보리에 옥수수 알이 섞인 헐거운 것이었고, 찬은 고추장 한 종지에 해초를 간장에 버무린 무침이 다였다. 무를 몇 조각 썰고 애 주먹만 한 홍게 몇 마리를 넣어 끓인 국은 큰 사발에 담겨 있어 식구들이 병아리마냥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말이 없어 벙어리 가족이 모여 앉은 것 같았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홍이가 눈가로 실 웃음을 지으며 아무나 좀 들으란 듯 말문을 열었다.
"엄마. 이 무침 참 맛 난다. 낮에 바닷가에서 뜯어온 거지?"
어머니 윤점이(尹點伊)가 남편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맞장구쳤다.
"그랴. 동네 아낙들이 가자고 보채기에 마지못해 나갔더니 해초가 그렇게나 많더구나. 매생이며 톳, 꼬시래기도 간간히 눈에 띄지 뭐냐. 미역도 있다던데 오늘은 없더라. 예전 산골에 살 땐 구경도 못하던 것 아니니."
이따금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곤 하는 바래였지만, 윤점이는 마치 생전 처음 해초를 따본 사람처럼 호들갑스럽게 대꾸했다. 홍이도 지레 화색을 띠며 살갑게 말을 받았다.
"그래. 나중에 나도 같이 가자. 많이 따면 팔아 어물하고 바꿔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동안 나도 구이 하는 솜씨가 제법 늘었는걸."
"그래? 무슨 어물이랑 바꿀까? 요즘 뭐가 물이 좋나?"
"지금 물 가리게 됐어. 멸치 토막만 봐도 침이 넘어가는 판인걸."
"그래, 맞구나. 뭐든 입에 들어오면 그게 수랏상이지. 호호호!"
"그래. 수랏상이구 말구. 깔깔깔!"
두 모녀가 서로 내기하듯 번갈아 웃자 숟가락에 든 보리밥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차상두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앉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주먹 쥔 손을 뒤로 돌려 허리를 두드렸다. 홍이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부지. 진짜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녜요?"
"그래요. 당신 요즘 몸이 좀 축나 보여요?"
"괜찮대도 그러는구나."
차덕구는 모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벽에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 상두가 기색을 살피다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핏기 없는 호롱불 아래 식구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윤점이는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맥이 빠진 홍이는 길어온 물이 아까울세라 어머니가 조심조심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방바닥으로 깔았다. 바닥에 깔린 헤진 멍석으로 쥐 오줌 자국이 어른거렸다. 낮에 집이 텅 비니 쥐란 놈이 활개를 치는 모양이었다.
지난 해 가을과 겨울은 이들 일가에게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새로 나라님이 들어서더니 세상은 이내 흉악해져갔다. 그 전 임금 때라 해서 살기가 편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구잡이는 아니었다. 관아는 구실아치부터 현감까지 농민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할 먹잇감으로만 치부했다. 한 해 농사 지어봤자 남는 건 지푸라기 한 줌밖에 없다는 악다구니가 가을바람 불 듯 골목을 헤집었다.
해 전에 죽은 사람의 인두세를 이웃에 떠넘겨 봉창하려 들었고, 환곡(還穀)이랍시고 모래가 태반인 쌀을 내주며 추수 뒤엔 온전한 섬 가마로 갚으라고 을러댔다. 갓난애부터 죽을 날 받아놓은 노인네까지 불알만 달렸다 하면 군포(軍布)가 물려졌다. 뱃속에 들어선 애는 무조건 사내였고, 죽었다 해명을 해도 물증을 내놓아야 번듯한 망자(亡者) 대접을 받았다. 죽음을 증명할 문건을 만드는 비용이면 차라리 그냥 세금을 내는 게 싸게 먹히니, 송장도 제 구실 못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차덕구 일가는 경기도 포천현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었다. 농경지가 거의 없어 안 그래도 살기가 빠듯한데 관아의 터무니없는 독촉에 시달리니 놓을 정신도 없이 허덕여야 했다. 그래도 차덕구는 사람이 좋아 인심을 잃지 않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지런동이라 그럭저럭 앞가림을 하는 편이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 상두가 골칫거리였다.
나면서부터 잔병치레 없던 차상두는 나이를 먹더니 점점 기골이 장대해졌다. 힘도 또래들 두세 몫은 하고도 남았고, 두 눈썹이 굵고 눈망울에 기운이 서려 있어 잘만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선망을 받던 놈이 장군은 고사하고 똥 장군도 하지 않을 패악질이 늘어갔다. 하라는 농사는 뒷전으로 물리고 동쪽으로 접한 가평현이며 북쪽으로 이어진 영평현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더니 어느새 질 나쁜 패거리들과 어울려 날밤을 새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남의 집 콩밭이나 서리해먹는 정도의 장난질을 하나 싶었는데, 점점 간이 부어만 갔다. 타작마당에 내놓은 볏가리를 통째로 훑어가는가 하면 장탉을 낚아채 가 삶아먹고도 모른 채 돌아다녔다. 어느 집은 딸년 시집갈 때 쓰려고 고이 모셔둔 옷감이 사라졌고, 옥비녀, 은가락지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관가에서도 벌집 쑤셔놓은 듯 풍파가 일어났다. 털어간 놈은 소소한 물품일지 몰라도 잃은 집에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귀중품이었다. 뻔질나게 찾아와 곡성과 원성을 쏟아내니 뒷짐만 지고 있을 순 없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관아에서 작정하고 덤비면 피할 구멍이 많지 않은 게 도적의 팔자였다. 결국 상두도 몇 차례 오랏줄 신세를 졌다. 그래도 동네 사람이고, 차덕구가 없는 살림에 뇌물을 밀어 넣어 볼기짝 몇 대 맞고 풀려나긴 했지만, 그렇게 요행과 요령으로 살 길을 도모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이제 마지막일세. 다음번엔 금덩이를 안긴다 해도 몸 성히 넘어가지 못할 터이니, 단단히 일러두게. 사또께서 화가 머리 끝, 아니 상투 끝까지 치미셨다니까."
덜컥 겁이 난 차덕구는 혹시나 사람 구실할까 싶어 이웃 마을에서 동네 애들을 가르치는 김 초시 영감에게 상두를 보냈다. 글줄이라도 익혀 까막눈을 면하면 세상 물정을 깨칠까 싶어 벼르고 한 짓인데, 이게 오히려 동티가 되고 말았다. 처음 손에 쥐어든 책이 룗동몽선습룘이었다. 동몽이라 하기엔 나잇속은 솔찮았지만 문잣속은 동몽만도 못했으니, 그나마 눈동냥으로 익히면 사람 꼴은 하리라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서당을 다녀오더니 차상두가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왜 똥 밟은 강아지마냥 징징대느냐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부지, 룗동몽선습룘 첫 줄이 뭔 줄 아요?"

평생 땅만 갈아먹고 산 차덕구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유인(惟人)이 최귀(最貴)랍디다. 하늘과 땅 사이 왼갓 물건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단 소리요. 그런데 정말 사람이면 그냥 다 사람 대접 받는단 겁니까? 양반은 죄를 져도 웃으며 빠져나가고, 힘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양반 죄까지 뒤집어쓰는 게 세상 아닌가요?"
처음엔 무슨 소린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서너 번 귀에 박히니 말귀가 들어 먹혔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놈아. 사람이라면 다 같은 사람이라고 누가 그러더냐? 김 초시 어른이 그러시더냐? 니가 허구한 날 얼굴 비비던 형방 나리가 그러시더냐? 사람 신분은 원래 그렇게 타고나는 것이야. 니가 뭔데 거기다 토를 달아. 니 같은 소리하다 역적 되어 목 날아간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알어."
그러나 상두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난 몰라요. 이젠 사람대접 좀 받고 살랍니다."
그냥 희떠운 소린 줄 알았는데, 결국 크게 사고를 치고 말았다. 고을에서 한 재산 하는 집안 어린 도령의 멱살을 쥐고 흔든 것이었다.
"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니만 사람인 줄 알아. 나도 사람이라고."
반말이든 높임말이든 일성은 크게 내뱉었지만, 메아리도 돌아오기 전에 나졸이 상두를 낚아채갔다. 한 동안 집안 전체가 관아의 나졸들에게 들들 볶였다. 재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 어린 도령 집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게다가 붙여먹던 논밭마저 거둬가 버렸다.
양반 댁의 앙갚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칠대장손의 기개를 하루아침에 꺾어놓은 불한당 놈을 그냥 살려둬서는 안 된다며 현감에게 가서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삼정승은 아니더라도 한양에 어깨 힘줄만 한 벼슬아치가 있는 집안이었다. 까딱 실수하면 알량한 지방관 자리도 날아갈 판이었다. 멍석말이라도 해서 물고를 내야 양반 댁 화가 삭아질 판이었다. 이제 자식은 개죽음 신세가 될 판이고, 식구는 대책 없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판이었다.
한겨울 추위는 점점 모질어졌고, 반쯤 불탄 집에서는 식구들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맞으며 오돌 오돌 떨고 있었다.
그때 형방이 슬쩍 오더니 기막힌 방안이라며 내놓은 게 `전가사변`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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