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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오피니언 임종욱 장편소설 「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제2장 전가사변 ②임종욱 작가
남해타임즈 | 승인2019.08.30 17:15|(661호)

"뭘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말이라 영문을 모른 채 차덕구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것 보라구. 이제 자네 이 고을에서 먹고 살긴 애당초 글러먹은 일일세. 그건 알지?"
관아의 눈 밖에 났고 세도 부리는 집안에 원한까지 샀으니 다리 뻗고 살기는 틀린 게 분명하기는 했다. 당장 올겨울을 날 일만도 꿈만 같았다.
"그런데 나라에 아주 좋은 제도가 있단 말일세. 자네만 단단히 마음먹으면 살 길이 열린단 말이지. 내 자네하고 평소 좋게 지냈고, 처지가 하도 딱해 보여 하는 말 아닌가."
뜸을 댓발이나 들이는 걸 보니 꼭 살 길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명주 모시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소상히 일러주셔야 소인 같은 놈도 알아먹지 않겠나요."
형방이 조금 주저하더니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냈다.
"간단한 일이야. 이 포천 땅을 떠나 다른 고을에 가 사는 일이지. 다만 혼자 가는 게 아니고 식솔 전체가 다 떠나는 일일세. 거길 간다고 갑자기 팔자가 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버티는 것보단 백 배 나을 걸. 당장 상두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남는 장사고. 또 양반 댁 원한도 깨끗하게 피할 수 있으니 더 따져 뭘 하겠는가."
말을 들어보니 아주 나쁜 수 같지는 않았지만, 뭔가 뒤끝이 말끔하지 않았다.
"지금 식솔이 다 간다고 하셨는데,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건가요? 기한은 정해져 있을 거 아닙니까?"
형방의 표정이 조금 씁쓸하게 변했다.
"아, 그게 말이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긴 어려워. 아, 이젠 집도 없고 땅도 없는데 돌아와서 뭐해. 거기 가서 정 붙이고 살면 되는 거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였다. 마흔다섯 해 평생을 살던 포천 땅이었다. 여기에서 장가도 들었고, 애들도 낳았다. 조부며 조모, 양친의 묘소도 이곳에 있었다. 먹고 살기 바빠 제대로 모시진 못했어도 기제(忌祭)며 세시 차례를 거르지는 않았다. 가을이면 벌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차덕구 역시 이곳에 묻혀 애들이 차려주는 제삿밥을 먹으려니 했다. 그런데 생이별을 하라는 소리였다.
"에구구. 선영이 전부 여기 있고, 일가붙이도 인근에 모여 사는데, 다시는 얼씬도 못한다니, 어찌 그런 형벌이 있습니까. 그러구는 죽어 어떻게 조상님 얼굴을 봬요. 차라리 여기서 얼어 죽지 그렇게는 못합니다."
차덕구가 죽는 소리를 늘어놓자 지금까지 점잖게 말을 건네던 형방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허, 이 사람 여즉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됐구먼. 기껏 처지가 딱해 좋게 말했더니, 아주 기고만장일세. 이건 내가 자네한테 권유하는 일이 아니라구. 관아에서 내리는 명령이야, 명령. 상두가 저런 패악질을 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이건 그 벌이란 말일세."
"아니, 벌이라면 상두 그 놈에게 내리면 그만이지 왜 애꿎은 식구들까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단 말씀입니까?"
형방은 더 이상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전가사변`이야. 집안 전체가 몽땅 깡그리 변방으로 옮겨가는 게야. 더 말할 필요 없네. 당장 보따리를 싸게. 가면 살 집도 줄 테니, 다 싸 짊어질 필요도 없어. 숙식은 역참(驛站)에서 해결이 될 테니 끼니거리도 필요 없고. 내일 다시 올 때까지 차비가 안 돼 있으면 경을 칠 터이니, 그리 알게."
그렇게 해서 홍수 난 날 강물에 떠내려가듯 밀려온 동네가 남해였다. 그렇게 까마득하게 먼 곳에도 사람이 살 줄 짐작도 못했었다. 한양 성 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차덕구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지나 섬 고을까지 구경 갈 일이 생긴 것이었다. 선영에 제대로 영결(永訣)도 못하고 차덕구 일가는 매서운 바람을 등지고 길을 떠났다.

그렇게 스무날 길을 걸어 남해 섬이 바라보이는 노량 포구에 다다랐다. 관아에서 지정해준 날짜보다 며칠 늦었다. 그 해 겨울은 그나마 동장군의 기승이 조금 덜한 데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날씨가 수더분해져 견딜 만했다. 하지만 낯선 길을 가자니 자꾸 엉뚱한 고을로 걸음이 옮겨졌다. 그래서 며칠 지체되었다.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남루함은 더해갔고, 마음은 더욱 갈가리 찢겨나갔다. 잔뜩 풀이 죽은 상두를 탓할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사나운 바닷바람에 해협의 물결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거듭 몸부림쳤다. 지랄병 환자가 거품을 내뱉고 사지를 뒤틀 듯 저 너머 보이는 섬 땅과 이곳 뭍 땅 사이에서 바다는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날랜 너울이 흉기처럼 바다를 갈랐다.
`저 곳이 우리 식구가 꼼짝없이 틀어박혀 살아야 할 땅인가?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살기나 한단 말인가? 당장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 저런 땅에…….`
첫 대면한 남해를 보면서 차덕구는 이상한 적개심에 사로잡혔다. 아니 적개심보다는 두려움이었다. 토끼 네 마리가 굶주린 승냥이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그 섬뜩한 두려움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람이 세찬 언덕에 서서 아내는 그의 왼팔죽지를, 딸아이 홍이는 오른팔죽지를 꽉 그러잡았다. 상두는 그때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성황당에 묵으면서 바람이 잦아져 배가 뜨기를 기다렸다. 꽝꽝 언 떡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허기를 채웠다. 다음 날 느지막해서야 거룻배가 움직였다. 그들 식구만 타는 것은 아니고 승선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먼노무 바람이 이리 쎄노. 오늘 배 뜨긴 글른 줄 알고 식겁했다 아이가." 노인 한 사람이 이물에 물건을 얹어 넣으며 사공에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시다. 그렁께 푸근할 때 좀 쟁여두시지 좋은 날 다 놔두고 이기 무신 고상이요."
사공이 엉거주춤 뒤에 서 있는 차덕구 식솔들을 보더니 눈짓으로 질문을 던졌다. 관아에서 들려준 문서가 있었지만, 그게 저 사공에게 통할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공은 눈치가 빨랐다.
"아, 전가사벤인가 뭔가 귀양 온 식구들인가 보네예. 먼 길 오시느라 욕봤십니다. 퍼뜩 올라타시다. 포구에서 포교 나리들이 기다리고 있십니다."
거룻배는 물결이 잠잠해진 해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물결은 가라앉았어도 물살은 바다 품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빠른 흐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몰아붙였다. 사공 몇이 뱃전에 달라붙어 물살과 사투를 벌였다. 배는 조금씩 섬으로 접근했다.
멀미를 하는지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예 홍이가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시원찮아 쌀뜨물 같은 허연 진액만 흘러나왔다. 코앞일 것 같은 거리가 열 마장도 더 멀게만 보였다.
"오늘도 헛걸음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야 꼴쌍을 보는구먼. 무슨 짓 하다 나흘이나 늦은 게야."
포구에 닿자 잔뜩 누비옷을 개켜 입은 포교 둘이 그들을 맞았다. 꽁꽁 얼어붙어 사색이 된 나졸 둘은 차덕구 일가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열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활활 타고 있는 화톳불만 연신 곁눈질했다.
포교 중 한 사람은 몸이 말랐고 키가 껑충하게 컸다. 하관이 가늘게 흘렀는데, 염소수염을 기른 얼굴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눈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옆에 선 땅딸막하면서 몸피가 있는 포교는 뭐가 마뜩찮은지 계속 인상을 쓰며 거드름을 피웠다.
"어서 오시다. 먼 길에 객고가 억수로 많았것소. 흠, 어디 이름을 보자, 차덕구, 윤점이, 차상두, 차홍이. 됐고, 어디 아픈 덴 없지예? 오늘은 여기 객점에서들 주무시고, 내일 읍성으로 가입시다. 쌔이 가서 몸들 좀 녹이시다."
자신의 이름을 박태수(朴太洙)라 밝힌 키 크고 마른 포교가 손짓으로 객점을 가리켰다. 차덕구 일가는 주섬주섬 행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땅딸보 포교는 생각이 달랐다.
"어이, 박 포교. 그렇게 물러가지고 어떻게 죄수를 다루겠나. 저것들은 여기 유람 온 게 아냐. 엄연히 국법을 어겨 유형(流刑)을 받은 죄인들이라구. 죄인들에게 따뜻한 객점이 가당키나 한가. 또 그 비용은 누가 내고? 그냥 바로 읍성으로 끌고 가 옥에 처넣어야지. 봐 주면 기어오르는 게 죄인들이야. 더구나 평생 볼 화상들 아닌가. 길 잘 들여야지."
이름이 조옹집(趙壅執)이라는 포교는 말본새부터 강퍅하기 그지없었다. 박 포교와는 달리 한 길쯤 되는 바위 위에 올라서서 네 사람을 꼬나보는 눈빛이 잡아먹을 듯했다. 차덕구는 오금이 저려왔고, 차상두는 노려보았다. 윤점이와 차홍이는 그저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올려다 볼 염도 내지 못했다.
박태수가 먼 바다로 눈길을 준 채 헛헛하게 웃으며 다독였다.
"허허, 인정머리허고는. 사람을 부리묵을라캐도 일단 힘은 쓰고로 만들어야지. 관가 돈 안 쓰고 내 돈 낼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게. 내일 호송도 내 혼자 할 테니 안심하시고. 자자, 추운데 욕 봤으니, 먼저 읍성으로 가시게. 옥진이한테 가면 술 한 상 봐줄 걸세."
그러자 조옹집의 굳은 얼굴이 봄눈 녹듯 한 꺼풀 벗겨졌다.
"그럴 텐가? 그럼 뭐 내가 신경 쓸 거 없겠구먼. 그래도 너무 풀어주면 안 돼. 그럼 낼 보세나."
조옹집은 재빨리 말에 올라타더니 저편 언덕을 향해 고삐를 당겼다. 말꼬리까지 사라진 것을 본 박태수가 웃음을 흘리면서 네 식구와 두 나졸을 보고 말했다.
"자, 자네들도 가세. 추운 데 고상했시니 탁배기 한 사발 들이켜야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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