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살아가는 의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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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살아가는 의미 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14 15:09
  • 호수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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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오동뱅이를 다녀오고 며칠 뒤였다. 해거름이 질 즈음 홍이가 밖에서 기척을 냈다.
"나리. 어떤 길손이 문안을 여쭙는답니다."
길손? 한양이라면 그럴듯하겠지만, 창황한 바닷가 섬마을에 자신을 찾을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관아에서 누가 오기라도 한 게니?"
홍이의 대꾸를 웬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가로챘다.
"천일(天一). 날세, 와려(臥廬). 그새 목소리까지 잊은 건 아니겠지?"
자(字)을 말하기도 전에 권문탁은 벌떡 일어났다. 한양의 죽마고우 신철민(申哲珉)이었다. 일어나면서도 권문탁은 제 귀를 의심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신철민이 멋쩍게 두 손을 벌리고 있었다. 어딘가 과장된 몸짓이었다.
"와려. 정말 자넨가?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아."
신철민은 옆에 홍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홍소(哄笑)를 터뜨렸다.
"내가 못 올 곳을 왔던가?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했으니, 남해라면 강남이 아니고 어디야. 헐헐헐!"
"예끼! 여긴 강남이 아니라 신선지향(神仙之鄕)이야. 어서 들어오게. 홍이야, 마을에 가서 술 좀 받아 오거라. 귀한 손님이 오셨구나."
영문을 몰라 두 사람만 번갈아보던 홍이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얼른 대나무 숲을 향해 잰걸음으로 내려갔다. 걸음 따라 나비처럼 춤을 추는 땋은 머리를 흘낏 보면서 신철민이 물었다.
"누군가?"
"날 돌봐주는 아이라네. 어서 들어가세. 안 본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전생에서나 만난 것 같군. 할 말이 태산일세."
권문탁이 내준 방석에 앉은 신철민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 천일이로군. 공부밖에 모르는 선비의 방다워."
"농담말게. 홍이가 치워주니까 이 정도나마 사람 구실한다네."
그 말이 뭔가 신철민의 가슴을 후벼 팠는지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래, 사람 구실하기 참 힘든 세상이긴 하지."
회한에 젖은 목소리가 권문탁의 심경에도 전해졌다.
"정말 무슨 일인가? 날 보러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테고. 남해에 무슨 연고라도 있는 겐가?"
신철민이 얼굴을 손으로 훑어 내리면서 대답했다.
"연고? 연고가 생기긴 했지. 그 연고가 고약해서 탈이지만 말이야."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권문탁의 가슴을 억눌렀다. 덩달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보게. 무슨 낭패기에 이리 뜸을 들이나."
신철민이 두 손을 불끈 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남해로 귀양을 오셨다네.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행이야."
갑자기 숨통이 막혔다.

"세상에……. 자네 아버님은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당상관이 아니신가? 그런 어른이 무슨 일로 유형을 당하셔? 전하의 역린(逆鱗)이라도 건드린 겐가?"
신철민이 붉어진 얼굴빛을 감추지 않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랬더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지금 세상이 주상 전하의 세상인가. 안동 김씨가 권력을 움켜쥔 게 어제오늘이 아닌 줄은 자네도 잘 알 걸세. 권신들을 조심하라고 전하께 간언을 올렸더니, 이게 역모보다 더 흉측한 죄로 돌아오더군. 김조순의 사주를 받은 간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심(聖心)을 어지럽힌 아버님을 당장 죽이라고 상소가 빗발치듯 했네."
그제야 경위가 헤아려졌다.
"그럼 사직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지. 충간을 했다고 유형을 보낸단 말인가? 어디에 그런 법이……."
"김조순의 손아귀에 그런 법이 있다네. 자네 아버님은 그런 치도곤을 당하지 않으셨으니 잘 모를 게야."
뭔가 가시가 돋친 어투였지만,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뭔가 다시 말을 이으려는데, 밖에서 홍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왔느냐?"
"예. 주안상을 봐 왔사옵니다."
"그래. 들어오너라."
홍이가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상을 놓고 나갈 때까지 방 안에는 냉기만 흘렀다. 권문탁이 술잔을 채우자 신철민이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말없이 오가는 술잔이 네다섯 순배가 돌았다. 신철민은 울분을 술로 녹여버릴 기세였지만, 권문탁은 침통한 심정에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신철민의 부친은 대쪽 같은 성격의 강성 정치인이었다. 권세가 하늘을 날던 김조순도 그 어른만은 껄끄러워 하지 않았던가? 나라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라면 저런 분을 본받아야 한다고 권문탁도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하루아침에 당상에서 쫓겨나 변방의 섬으로 내쳐질 만큼 세상은 표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대인(大人)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 옥체는 여일(如一)하시고?"
당장 안위가 몹시 걱정되었다. 남해까지 유배를 왔다면 몸이 성할 리 없었다. 남해현이라면 유형 3천 리 배소(配所)였고, 응당 장(杖) 1백 대가 더해졌을 터였다.
기어이 신철민이 울음을 터뜨렸다.
"물고(物故)를 당하지 않으신 것만도 천운이야! 김조순 이 놈은 아버님을 이 기회에 요절을 낼 작정이었네. 모진 형문을 용케 참아내셨지만, 몸이 말이 아닐세. 언제 망극한 일을 당할지 몰라. 배소가 정해지지 않아 관아 감옥에 갇혀 계시다네. 자네 어른께서 평소 친분이 있으셨으니, 편의를 봐 주실 만도 한데 얼씬도 하지 않더구먼. 김조순의 마수가 무서운 게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신철민의 아버님이 김조순의 비위를 긁는다는 걸 모를 리 없어 내왕은 하지 않았지만, 사석에서는 올곧은 분이라며 두둔하곤 했었다. 그런 분이 자기 관할로 유형을 왔는데 모른 체 하신단 말인가? 권문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세. 내 당장 아버님을 뵙고 말씀을 드리겠네."
신철민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니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자네 춘부장께서도 내켜 그러시겠나. 워낙 관직에 미련이 많으신 분 아닌가? 악운(惡運)은 비껴가는 게 상책인 줄 아시는 게지."
그 말이 권문탁의 심장을 도려내듯 아프게 다가왔다. 그깟 권력이 무슨 대수기에 사람을 이렇게 병들게 하는가? 권문탁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저 허탈해서 자넬 찾아온 걸세. 그래도 자넨 못난 날 반겨주려니 해서 말이야."
신철민의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든 것에 절망한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텅 빈 소리였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머잖아 좋은 소식이 올 걸세."
신철민이 넋 나간 표정으로 맥없이 웃었다.
"온다고 해도 꽤 먼 훗날일 거야. 듣자니 자넨 여기서 내후년 식년시를 준비한다지? 난 진즉에 포기했네만, 열심히 해서 올바른 관리가 되게. 김조순의 개가 되지는 말고."
갑자기 지금의 이 자리가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결국 자신도 그 개가 되려고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새겨졌다. 고개를 숙인 채 권문탁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네 당나라 말 때 반란군 수령 황소(黃巢, ?~884)를 아는가?"
권문탁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신철민을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황소라니, 무슨 소린가?"
신철민이 자작하더니 술잔을 비웠다.
"황소도 우리처럼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였다네. 몇 차례 고배를 마신 뒤에야 실력이 있다고, 노력한다고 급제하는 게 아닌 줄 알았지. 권력자, 간신배의 자제가 아니면 급제는 꿈도 못 꿀 일이란 걸 깨달았다네. 그 길로 황소는 과업(科業)은 내팽개치고 반란을 계획했다네. 세상이 뒤집혀야 세상이 바로서는 걸 간파했던 게지. 그에게 국화를 노래한 시가 있다네. 이 가을날 딱 어울리는 작품이야. 한번 들어보겠나."
신철민은 권문탁의 의사는 개의치 않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환멸 가득 찬 목소리로 시를 읊조렸다.

스산하게 부는 가을바람 타고 뜰 가득 피었는데,
꽃술도 차고 향기도 식어 나비도 오기 어렵겠네.
언젠가 내가 봄을 다스리는 신이 된다면,
복숭아꽃과 함께 같은 곳에서 피어나리라.
颯颯西風滿院裁 寒香冷蝶難來.
他年我若爲靑帝 報與桃花一處開.

기다려라 가을이 와서 중양절이 가까워지면,
내 꽃은 활짝 피고 온갖 꽃들은 다 시들리라.
하늘 가득 국화 향기가 장안을 뒤덮으리니,
성 안은 온통 황금 갑옷이 두를 것이다.
待到秋來九月八 我花開後百花殺.
沖天香陣透長安 滿城盡帶黃金甲.

황소의 원한은 바로 신철민의 원한이었다. 신철민은 한동안 멍한 눈길로 방 안 한쪽 구석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눈가를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 역시 권력에 빌붙어 살고 싶었던 것 같네. 그 물이 얼마나 달콤한가? 특권은 다 누리고 부정을 저질러도 권력이 끈끈하게 보호해 주지. 그 울타리 안으로 나도 들어가길 원했던가 보네."
권문탁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지금 그런 처지였다.
"그런데 말일세. 한번 사는 인생 아닌가? 너무 뒤늦은 다짐이지만, 한번 사는 인생에서 이젠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네."
"그게 뭔지 아나?"
"모르지. 그러나 적어도 이건 아니야.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하늘이 그 `살아가는 의미` 알려주겠지."
"그럴까?"
"나는 그리 믿네. 그만 일어나야겠네. 어떻게 하든 아버님을 뵈어야 해."
권문탁은 급히 몇 자 적어 신철민에게 쥐어주었다.
"성 안에 가면 객점이 있는데, 거기서 박태수라는 포교를 찾아 이 글을 보여주게. 혹시 무슨 수가 날지도 몰라."
"그럼세.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잘 지내게."
맥없이 대나무 숲을 돌아 내려가는 신철민을 권문탁과 홍이가 배웅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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