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남해 독일마을맥주축제가 한창이던 지난 사흘간(3~5일) 독일마을에서는 조촐하지만 특별한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역군이던 파독광부·간호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볼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문화관광해설사 하희숙 씨의 진행으로 이들이 겪은 시련과 고난, 사랑과 낭만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콘서트 말미 광부 신병윤 씨가 들려주는 색소폰 연주 `해변의 여인`은 듣는 이의 마음을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독일마을에는 현재 22명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산다. 지난 호 파독 간호사 서부임 씨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파독광부·간호사 부부 신병윤·서원숙 씨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이국땅 길 맞은편 광부·간호사 기숙사 오가며 맺은 사랑
남해에 반해 독일마을 정착
민박 운영하며 여전히 간호사 일 해
어떤 계기로 독일에 가셨나 = 신병윤 : 내 고향은 벚꽃으로 유명한 항구도시 진해인데 우연히 신문에서 파독광부 모집공고를 봤다. 계약기간 3년에 200만원이었다. 일은 힘들고 위험했지만 월급은 우리나라의 10배 수준이었다. 우리는 용돈만 남기고 번 돈을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다. 물론 데이트비용은 남겼다.(웃음) 광부도 간호사도 3년 국가와의 계약이었다. 광부는 8천명, 간호사는 1만 명 정도 됐다. 3년 마치고 돌아올 계획이었는데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20년 넘게 살았다.
지하 1200미터까지 내려가서 석탄을 캤다. 그 아래서 두렵고 겁나지 않으셨나 ^ 신병윤 : 독일에는 지하에 석탄이 있다. 지하 600, 800, 1200미터까지 내려가 탄을 판다. 1000미터면 지열이 난다. 보통 섭씨 32~33도까지 올라간다. 갱도로 들어갈 때마다 동료들끼리 `글뤽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라고 인사를 했다. 파독전시관에는 당시에 쓰던 작업용 점검지팡이가 전시돼 있다. 작업반장이 천장상태를 점검하는 데 쓰이지만 또 다른 기능이 있었다. 지팡이를 보면 가운데에 나사가 있어 분리가 된다. 그 안에는 손가락만한 위스키 병이 들어있다. 지하에서 사고가 나거나 다치면 응급처치용으로 마신다. 독한 술로 잠시나마 고통을 잊는 거다. 나도 다친 적이 있는데 독일인 동료가 품에서 위스키를 꺼내 한 모금 마시라고 하더라.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 = 서원숙 : 제가 근무한 병원이 있는 시골마을에는 한국인 광부가 200여명이 있었다. 광부 기숙사가 우리 기숙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우리가 장을 보러 기숙사 앞을 지나게 되면 광부 남성들이 창으로 쳐다보곤 했다. 나는 의학공부를 하고 싶어 간호전문대를 마치고 독일에 갔다. 그런데 1년 만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어떤 계기로 남해에 정착하셨나 = 신병윤 : 우리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좀더 일찍 귀국했다. 외국에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외국인일 뿐이다. 자식들은 이방인으로 살게 하지 않으려고 일찍 귀국했다.
서원숙 : 독일에서 결혼하고 2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왔다. 그때 시댁 가족들과 남해여행을 오게 됐다. 남해대교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노량마을이었다. 그곳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중에 귀국하게 되면 대도시보다는 남해 같은 곳에서 살자고 마음먹었다. 군에서 농어촌 민박 허가를 내줘서 지금은 민박업을 하고 있다. 호수 같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있어서 집 이름도 알프스하우스라고 지었다.
서원숙 선생은 간호사이고 지금도 삼천포 요양병원에서 간호사생활을 하고 계신다. 왜인가 ^ 서원숙 : 한국에서 요양시설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호사 자격증만으로는 안 되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우리 마을에 한국인 아내가 먼저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 독일인 남편이 계신다. 요양병원에 계신 그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받은 친절과 차별 없는 대우가 너무 고마워서 그걸 갚고 싶었다. 그래서 삼천포병원에 재취업했다. 독일 분들이 우리에게 베푼 친절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