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북쪽에서 들리는 소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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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북쪽에서 들리는 소식 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25 14:07
  • 호수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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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요즘 포교 박태수는 심사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조옹집의 속내를 들춰볼 생각으로 던진 농담이 이상한 비수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홍이를 제 각시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들은 뒤부터 술자리는 박태수에게 가시방석이 되었다. 불을 지른 게 자신이었으니 말릴 수도 없었고, 부추기기는 더욱 만부당한 일이었다.
"시상에 계집이 없어 유배 온 집구석 여자를 넘보나? 그건 나라법으로도 금지되어 있는 일인 줄 알 거 아인가?"
고작 이런 정도 으르는 게 다였다. 그러나 이 말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뭔 소린가? 죄인의 계집이니 다루기가 더 쉽지. 속량하면 관아도 좋고, 또 그 집구석도 살 판 나는 거 아닌가? 나 같은 힘 있는 포교를 사위도 얻어 해로울 게 뭐 있어? 내일이라도 당장 현령을 만나 다짐을 받을까 싶으이."
조옹집은 벌써 일이 다 매조지된 것처럼 의기양양해 헤헤거렸다.
"여보게. 섣불리 덤비다간 동티나. 지금 현령께서는 승진에 목을 매달고 계신데, 심복이라는 자네가 죄인 계집에게 군침 흘리고 있다는 걸 아시몬 무척이나 기뻐하시것어. 만사 때가 있는 법이여."
"그런가?"

사람이 성깔만 있지 슬기는 없는 조옹집이었다. 한 마디 말에 기세가 꺾여 기회를 살피겠다는 선으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조옹집의 불난 양물을 식히느라 기생 하나를 대줘 돈만 축냈다.
부아를 감추지 못하고 집으로 와 기막힌 사연을 옥진에게 털어놓았다. 눈치 빠른 옥진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위를 알아차리고 펄펄 뛰었다.
"아니, 뭐 그런 개잡놈이 다 있스까이. 홍이가 심성도 비단결 같고 일솜씨도 야무져 낭중에 객점 일이나 가르쳐야 쓰것다 싶은 참인디, 뭐라고라고라. 그 불쌍놈이 날로 쳐드시겠다고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수작 마씨요."
분기가 오르니 평소 쓰지도 않던 호남 사투리가 술술 풀려나왔다.
"아, 그 망나니가 한 번 하겠다믄 하는 눔 아이가. 대충 얼부려 놓긴 했는데, 이게 무슨 깽판을 칠지 걱정이네."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요. 홍이 고 어린 것을 강생이만도 못한 놈 품에 안기겠단 말이요. 단속 잘 하씨요."
옥진이 찬바람이 돌 만큼 사납게 박태수를 째려보다 치맛자락을 획 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일이 있고 보니 영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옥진이 평소엔 서글서글하지만, 한 번 심사가 꼬이면 물불 가리지 않는 별난 구석도 있었다. 수틀리면 아무리 조옹집일지라도 삿대질을 할 사람이었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며 동헌 뜰을 지나가는데, 호방이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비칠거리며 다가와 그를 잡아끌었다.
"아, 뭔 일이고. 안 그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내가 뭔 죄라도 지었나?"
박태수가 육모방망이를 휘저으며 호방을 흘겨보았다. 호방과 박태수는 집안 형제 벌이어서 평소 흉허물 없이 어울렸다.
"사람아, 그럴 만하니 붙잡지. 아까지름에 관아 곳간을 담당하는 관속이 그러는데, 얼마 전부텀 곳간 재물이 조금씩 빈다는 게야. 뭐 아는 것 없남?"
정신이 버쩍 들었다. 관아 경비가 박태수의 소관은 아니었지만, 도적이 들어와 관아 물품을 집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게 알려지면 현령이 포교부터 조질 게 뻔했다. 누구보다 재물 모으기에 혈안인 현령이 결코 눈감아 줄 리 없었고, 신임을 받는 조옹집보다 자기에게 먼저 불화살이 날아올 터였다.
"확실한 소리요?"
"어여 가봐. 자네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께, 산불로 번지기 전에 잡아내소."
박태수는 똥줄이 타 단걸음에 곳간지기를 만나러 달려갔다.
"호방 말이 참말인가?"
박태수가 으르렁거리자 곳간지기는 두 말 않고 장부를 펼쳐보였다.
"보소. 내가 달포마다 물품을 점검하는데 한 달 보름 전부터 아귀가 맞지 않는다니까."
장부라면 그도 남 못지않게 밝았다. 과연 우수리가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헌데 다른 물품은 멀쩡한데 돈꿰미에서 야금야금 손재수가 끼어들고 있었다. 누군가 돈만 노리고 빼간다는 말이었다.
"호방 말고는 아직 아무도 모리제?"
"당장은 그렇지만, 장 모른 체 할 순 없을낀데."
"내가 잡아내 채워줄 테니 당분간 끽 소리도 마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고 옥사(獄舍)가 있는 관아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마침 옥사는 비어 있어 사람 눈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송장이 되어 유배를 온 고관 한 사람이 끙끙 앓고 있었는데, 결국 숨이 꼴까닥 넘어가고 말았다. 도령님이 써준 기별을 읽고 아들에게 편의를 봐 주었다. 애비의 숨이 넘어가자 하늘이 무너져라 울면서 서문 넘어 으슥한 곳에 가묘(假墓)를 세우고는 시신을 빼 나갔다.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듯했다.
누굴까? 여염집도 아니고 경비가 삼엄한 관아까지 들어와 돈을 털어갈 놈이라면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게다가 푼돈이 아니고 목돈이 필요한 작자의 소행이었다. 돈에 주인 이름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잖은 돈을 유통했다간 당장 발고가 날 일이었다. 목숨을 잃을 각오가 아니면 못할 짓이었다.
하루 밤낮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끝에 대강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놈이 아니면 감히 못할 짓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깨갱 소리라도 내고 죽자는 모진 결심을 할 만한 위인이 그 놈 말고는 없었다.
저물녘해서 죽산 좀 지나 있는 뒷산을 찾았다.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겨울 농한기 때 죽기(竹器)를 만들어 육지로 내가 팔아 이윤을 남길 목적으로 관아에서 대나무 벌목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곳에 차상두도 차출되어 와 있었다.
나졸에게 돈 몇 푼을 집어주고 차상두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나왔다.
"왜 이래요?"
차상두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몸을 보채면서 투덜거렸다.
"니 뒈질려고 환장했제? 등떼기 좀 보자. 목심을 몇 개나 달고 있는가 보게."
나상두는 상소리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아닌 밤중에 뭔 홍두깨 같은 말씀입니까?"
긴 말을 얹기도 싫었다.
"니 밤마다 관아 곳간에 들어가 돈꿰미를 털었다메. 본 사람이 있으니 군소리 말어. 이 미친놈아!"
그제야 차상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뭐라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눈치더니 곧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혼자 한 짓이요. 식구들은 아무도 모르니까 나만 죽이시오."
긴가민가했는데, 차상두가 이렇게 나오니 맥이 탁 풀렸다.
"대체, 대체……무슨……"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고 다그치고 싶은데, 말이 이어져 나오지 않았다. 차상두가 알아서 말을 엮어 주었다.
"배 한 척 장만해 달아나려고 그랬습니다. 이 섬 구석에선 옴짝달싹할 수 없지만, 배만 있으면 식구들 데리고 달아날 수 있잖아요. 제길, 이젠 다 틀렸네. 내 죽는 건 억울하지 않지만 아부지, 어무이, 홍이 남은 식구들이 불쌍하요. 끝까지 불효자로 죽네."
차상두가 곧 목이라도 떨어질 사람처럼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철이 없는 놈이 있나. 어이가 없었다.
"이 시상아. 배만 있다고 달아날 성 싶더냐? 네 식구가 달아나면 어디로 달아나? 조선 팔도가 니 놈 잡으려고 길길이 날뛸 텐데? 내가 니 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것다."
곧 오랏줄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호통만 치자 안심이 되었는지 눈길을 박태수에게 주며 차상두가 주섬주섬 말을 이었다.
"포교 나리는 요즘 돌아다니는 소문도 못 들으셨소?"
이건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소문? 배 타고 달아나면 나라에서 가상타 여겨, 고상이 많체 하몬서 용서해 줄 게라는 같잖은 소문이라도 돌디?"
이번엔 차상두가 어이없어 했다.
"포교 나리 완전히 등잔 밑이 어두우시네. 저기 저 평안도에서 정도령이 나타나 세상을 개벽시킬 거라는 소문이 남해에도 돌고 있는데, 그걸 못 들으셨던 말입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명색이 기찰(譏察)을 맡은 포교인 그가, 아무리 삼천 리 밖 관서(關西) 지방이라지만 반란의 흉흉한 낌새를 염탐하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 그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말을 입에 올리고 들통 나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날 수 없었다.
박태수가 차상두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들었는지 모리것다만 다신 입도 뻥끗 말래이. 남해 사람들 다 죽어."
차상두가 박태수의 손을 홱 뿌리치며 지지 않고 대들었다.
"정말 청맹과니네. 그 정도령이 신분 차별도 없고 만인이 배불리 사는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준답디다. 소문만 있는 게 아니고 참언(讖言)인지 부적 같은 게 있대요. 그것만 지니고 다니면 세상이 개벽할 때 다 살게 해 준답니다. 그래서 배 타고 식구 데리고 평안도 가려고 관아 돈 좀 훔쳤습니다. 그거 다 백성들 뼈골에서 나온 거 아닌가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더 이상 차상두를 감쌌다가는 제 목까지 날아갈 판이었다. 갑자기 차상두가 무서워졌다.
"참언이라니,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니 제발 좀 정신차리래이."
"나 참 이래도 못 믿을까."
차상두가 윗도리 안춤을 뒤척거리더니 꼬깃꼬깃 접은 종잇조각을 내놓았다.
"자 포교나리께서 읽어보세요. 난 글이 짧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니."
종잇짝을 손으로 대충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 뭔가 적혀있기는 한데 해가 넘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움츠리며 뚫어져라 보니 글자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일사횡관(一士橫冠)
귀신탈의(鬼神脫衣)
십필가일척(十疋加一尺)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

다 아는 글자였지만, 무슨 소린지는 죽다 깨어나도 알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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