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을 헐어서 제방을 쌓았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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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헐어서 제방을 쌓았다는 이야기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25 14:51
  • 호수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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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10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위의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서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에 읍성을 헐어서 사용했다`는 역사적 현장을 필자는 봉천에서 멱 감으며 성벽 돌로 추정되는 잘 다듬은 어마어마한 큰 돌들 밑에서 미꾸라지 묶은 대꼬챙이로 손바닥 보다 큰 참게와 가재를 많이 꼬셔내었다. 봉천의 언막이로 하마정들과 파천들에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그 때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치수에 치중할 때이고 우리 조상들은 그 때 어떻게 홍수를 막아 마을과 농토를 지켰는가를 후대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읍성의 역사요, 남해의 역사이며 우리 조상들의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망운산 줄기가 읍성을 가로 질러 강진 바다 쪽으로 뿌려놓은 묏부리는 봉강산, 윗 당산, 아랫당산과 동(東)뫼인데 홍수 때 봉천물이 내리치는 힘으로 동뫼 큰 바위 밑은 아주 깊었다. 물속으로 자맥질해서 들어가면 바위 틈새로 큰 굴이 있었다. 그 당시 그 굴속으로 몸을 들이밀면 짚단만한 잉어가 파랗고 큰 눈을 굴리고 있었는데 폐활량과 지구력과 담이 커야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잉어를 만져보려고 더 깊숙이 몸을 넣었다가 큰 잉어가 굴을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물속에서 온 몸으로 잉어의 매끈한 피부와 접촉했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봉천은 읍성 동문 안에서 강진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니 읍민들의 빨래터요 휴식공간이었으며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여름 날 물속에 오래 있다가 입술이 파리해지면 햇볕에 달구어진 이 큰 바위에서 뒹굴며 몸을 말리던 추억이 새롭다.
봉천의 하류인 동뫼의 끝 부분에 자리한 용왕바위 주변은 많은 물이 급경사로 굉음과 함께 무서운 소용돌이로 내리쳐 더욱 깊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용왕바위 안쪽의 논을 `용왕마지기`라 불렀다.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 나오는 성을 헐어서 쌓은 큰 돌들은 지금은 모두 콘크리트의 옹벽 속으로 묻혀 버렸다. 읍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남산다리와 입현다리 사이의 방천에도 엄청나게 큰 돌들이 박혀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읍성의 성벽 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봉천 하류의 용왕바위는 봉천의 거센 물줄기가 부딪치는 곳에 뿌리를 내려서 언이 터지지 않게 용왕마지기를 지키던 고마운 바위였다. 그 바위가 용왕바위 또는 정승바위라고도 전해왔으며 동네 안쪽으로 들어오면 당산 아래 큰 바위가 있는데 정승 비릉뱅이라 불렀으며 해마다 동제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다. 두 개의 큰 바위에 왜 정승이라는 명칭이 들어갔는지는 필자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제모시는 정승 비릉뱅이는 온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막강하고 유서 깊은 용왕마지기 지킴이 용왕바위는 봉천의 직강공사 때 파괴되어 없어졌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이곳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았고 동네 김참봉 어른께서 멱 감을 때 벗어놓은 옷을 모두 감추시곤 하셨다. 그 이유는 너무 깊어 위험하고 용이 놀았던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옷을 돌려주신 김참봉 어른은 용왕바위 옆 잔디밭에서 해동명장전 이야기와 우리 동네에 귀양 오신 조정의 정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정하여 이이명 선생이 왕이 되려한다는 간신들의 모함이 진실이었다면 참봉 어른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용이 못된 이무기에 대한 이이명 선생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하는 가정도 해 본다.
이 용왕바위 밑으로 용이 드나드는 굴이 있어 강진 바다 깊은 곳으로 통한다는 전설도 전해왔다. 어릴 적 강진바다 선소와 쐬섬 사이의 용오름 현상을 봉천용왕바위의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 믿으며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이 몰려갔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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