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놀이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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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놀이하는 사람들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28 13:59
  • 호수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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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계절의 변화는 하늘을 보면 안다. 그저 구름이 떠돌고 새들이나 가끔 선을 그어놓는 텅 빈 공간인 것처럼 보여도 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의 흐름이 하늘에는 있었다. 손으로는 잡히지 않아도 몸으로는 느껴지는 그 기운의 움직임에 따라 계절은 제 몸의 색깔을 바꾼다.
가을이 깊어가자 하늘은 키가 낮아졌다. 그래서 그늘이 일찍 드리우고 밤이 성큼 검은 얼굴을 내밀었다. 키가 낮아진 만큼 날은 빨리 쌀쌀해졌다. 예전엔 높은 하늘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물기들이 어느 새 땅에 내려와 가장 먼저 이운 풀들을 적셨다. 멀리 부엉이들이 식구들을 찾는 소리를 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둑길을 포교 박태수는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그의 등에 어둠이 몇 움큼 내려앉았다. 키가 커서 파리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어깨가 의외로 다부져보였다. 오랜 동안 군사 훈련으로 단련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어깨였다. 차상두는 걷느라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등으로 밀어 올리며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반 어린 눈빛으로 박태수를 뒤따랐다.
"포교나리. 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 겁니까?"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관아의 곳간에 손을 댄 사실이 들통 난 뒤 차상두는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숨겨둔 돈꿰미는 탈탈 털어 돌려주었지만, 이미 사달이 난 만큼 아무리 박 포교가 감싼대도 관아에서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 작정한 터였다.
그랬는데 며칠이 지나도 별 탈이 없었다. 탈이 없으니 더 두려워졌다. 머리 위로 시퍼런 언월도가 실낱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불쾌감이 내동 떠나지 않았다. 벼락이 치는 들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어서 빨리 벼락을 맞았으면 싶었다.
그러다 오늘 저녁 박태수 포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냇가에 나가 세수를 하고 있는데, 문득 등 뒤가 서늘해 돌아보니 핏빛 노을을 등지고 한 사내가 거인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따라 오래이."
그래서 올 것이 왔다는 체념으로 따라나섰다. 조옹집이 아닌 것이 다행이란 심정이었다. 무슨 치도곤을 당할지는 몰랐지만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나 하나만 당하길 바랄 뿐이었다.
"죽을 일은 없으니께 내빼지만 말어. 니 놈 등짝 쫓기도 신물이 나여."
강진만의 물결소리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였다. 차상두는 침을 한 번 탁 뱉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흥둥망둥 걷다보니 마을이 나왔다. 전에 대국산성 산판 갈 때 지나온 듯도 했지만, 어두워 가름이 되지 않았다.
그믐도 아닌데 구름이 낮고 짙어 달빛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박태수 포교는 칠흑 같은 골목길을 손금 보듯 잘도 걸어갔다. 옹기종기 들어선 초가집들은 사람 떠난 동네처럼 인기척조차 없었다. 차상두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마을도 훌쩍 지나 논이 나왔다. 목적지가 다른 데였나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저 멀리서 쿵쾅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게슴츠레 눈길을 낮춰보니 대나무를 촘촘히 엮어 울짱을 두른 담벼락이 보였다. 대나무가 네댓 길 높이로 쳐졌는데, 담장 폭이 서른 척은 훌쩍 넘을 듯했다. 뭘 하는 곳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에 섞여 어수선하던 소리에 비로소 가락이 얹혀 들렸다.
그것은 꽹과리와 북, 장구, 징이 어우러져 내는 풍악 장단이었다. 장단은 빠른 가락으로 흘렀다가 잠시 차분해지더니 곧 흥겨운 행보로 바뀌어갔다. 호이 호이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울짱을 빙 돌아 반대편에 이르니 쪽문이 나타났다. 박태수 포교는 으레 그렇다는 듯 육모방망이로 문을 밀었고, 열리는 문틈으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안으로 든 차상두는 잠시 눈이 부셨다. 안은 큰 마당이었다. 저 멀리 움막이 한 채 놓였고, 그 사이 모래흙으로 다져진 땅 위로 사람들이 빙 둘러 기물을 두드려댔다. 모두들 머리에는 네댓 발 되는 상모를 쓰고 있었다. 하얀 상모가 어지럽지만 질서 있게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이따금 그 반대로 돌았다.
대나무 담에 기대 곰방대를 빨고 있던, 키가 어중간한 노인네가 두 사람을 보더니 성큼 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주름으로 덮였는데 상투로 말아 올린 머리는 온통 백발이었다.
"왔남?"
"야."
"야가 그 말하던 갸가?"
노인이 차상두를 슬쩍 훔쳐보면서 물었다.
"야. 가심에 화톳불 댓 개는 품고 사는 놈이요. 그냥 나ㅤㄸㅝㅤ 버리몬 제 풀에 타 죽을 까봐 델꼬 왔소."
노인이 다시 차상두를 아래위로 꼬나보았다. 곧 멱을 딸 짐승의 급소를 찾으려는 품새였다. 공연히 몸이 위축되었다. 차상두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부처님이 목심을 줄 때몬 죽을 땅도 마련해 내려 보내는 법인디. 니 매구는 놀아 본 적 있나?"
매구? 생소한 말이었다. 기물이나 가락으로 보아 농무(農舞)일 것은 분명했지만, 여기서는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다.
차상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갱기도서 왔다니 매구는 처음이것지. 뭐 매구 해적이야 나중에 챙겨 듣구 매구패들 하고 인사부텀 나눠. 난 집들이굿놀음 때 `업`을 모시며 업잽이 노릇을 하는 영감탱이라네. 어이! 잠시들 셔. 새 식구 왔신께."
노인네가 목청 높이 외치자 맴을 돌며 장단을 놀던 사람들이 놀음을 멈추었다. 양편에서 타고 있는 장작불에 얼굴은 불길처럼 일렁거렸고, 땀으로 번들거렸다. 너나없이 목에 두른 수건을 풀어 땀을 훔쳤다.

매구패들이 차상두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섰다.
스무 명 남짓 되어 보였다. 사람들이 굴러온 강아지를 보듯 눈을 멀뚱거리며 차상두를 에워쌌다. 다들 낯설었다. 박태수가 겁먹은 차상두를 보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여기 고현에서 매구치는 치들이야. 젊은 애송이부텀 낼 모래 황천 물 마시러 갈 영감님까정 치레는 다양해두, 매구로는 이력이 난 이들이지. 앞으로 자주 볼낀께 얼굴 잘 익혀놔."
차상두는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투박한 성격의 차상두는 그리 붙임성이 좋지 않았다. 동무들 중엔 대면하자마자 말 트고 흉허물 없이 지내며 터수가 좋은 놈도 있었지만, 그는 사뭇 달랐다. 사람과 사귀기가 들짐승 달래기보다 더 어려웠다. 이게 관물(官物) 훔쳤다고 박태수 포교가 내리는 형벌인가 싶었다.
다들 웃으면서 반갑다는 마중을 했지만, 차상두는 엉성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쭈뼛거렸다. 그때 저편 움막 앞에서 투실하게 살이 찐 스님이 그네들을 불렀다.
"어여들 와 뜨끈한 국물 좀 들어. 땀 마리몬 바로 개짐머리 찾아와여. 허기도 채우고."
그 말에 사람들이 와르르 움막으로 달려갔다. 박태수와 차상두만 멀뚱히 남았다. 박태수 포교가 차상두의 등을 툭 치면서 앞장세웠다. 차상두는 볼일 보고 뒤를 안 닦은 아이처럼 얼기설기 걸음을 옮겼다.
통나무를 듬성듬성 잘라 다리를 세운 좌판 위에 먹거리가 놓여 있었다.
박태수 포교가 틈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김이 펄펄 나는 솥에 코를 빠뜨리며 냄새를 삼키더니 말했다.
"냄시 한번 죽이네. 닭을 잡았는감?"
스님 복장을 한 이는 가까이서 보니 여자였다. 나이는 꽤 들어보였는데, 젓가락을 넣어 잘 익은 닭을 꺼내 두툼한 손으로 살을 발라내며 말을 받았다. 아무리 봐도 살생을 멀리 할 스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새로 손님이 온다니께 상쇠 어른이 인심 한번 크게 썼지. 얼마나 잘 여물었는지 배 터지게 먹고도 남겠어야."
스님이 눈을 한번 찡긋하더니 차상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총각, 어서 와. 난 이말심(李末心)이라고 혀. 매구칠 때나 굿놀음할 때 `조리종` 노릇을 혀지. 중이 왠 괴길 먹냐고 놀리면 안 디야. 시님 놀리믄 지옥 간다 이 말씸이지. 이말심이 말 잘 드리면 자다가도 괴기를 먹는 수가 생기니 이 말씸 맹심혀야 혀."
들을수록 아리송한 말을 이말심 노인은 잘도 풀어냈다.
박태수가 히죽 웃으며 꽹과리를 들고 있는 노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덕분에 오늘 보신 잘 하네예. 상두야, 너도 인사 디리라. 우리 매구패에서 상쇠를 맡고 계신 구자효(具滋涍) 어른이시다."
키가 작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노인이 얼음도 녹일 봄바람 같은 웃음을 지으며 차상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왔네. 신명나게 두드리고 돌고 외치다 보면 세상 근심 다 사라지는 게 매구 이치 아닌감. 자넨 덩치도 좋고 허니 북을 치면 그만이것구먼."
그러더니 구자효 상쇠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닭다리 하나를 들어 차상두에게 안겼다. 남해 와서 처음 보는 닭다리였다. 염치도 모르고 차상두는 닭다리를 덥석 잡아 물어뜯었다.
"어허, 야가 먹성도 좋네. 힘은 지대로 쓰것어."
구자효 상쇠가 껄껄거리며 박태수가 부어 준 탁배기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여기저기 술추렴이 떠들썩하게 오가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더니 차상두에게도 빈 사발을 내밀었다. 큰 함지박에 담신 탁배기를 바가지로 퍼 차상두에게 따르고 자기 술잔에도 부었다. 나이는 차상두보다 몇 살 위일 듯한데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차상두가 긴가민가하며 쳐다보자 그가 씩 웃더니 말을 건넸다.
"내 모리것는가? 현령 나리 외동아들 그 되련님 모시는 방자네. 선소 정자집에서 몇 번 봤다 아인가?"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정자집에 필요한 땔감을 날라줄 때 마주친 적이 있었다. 방자란 사람은 눈썰미가 남달랐다. 그는 이어 묘한 말까지 던졌다.
"홍이 아씨도 잘 겨시지?"
누이동생에게 방자는 `아씨`란 말을 붙였다. 농이라 해도 유배 온 천한 집 딸을 두고 쓰기에는 어색했다.
"아, 예. 그럭저럭……"
말을 맺지 못하고 더듬거리는데, 상쇠 어른이 방자를 옆으로 밀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자네한티 북을 개리쳐 줄 스승일세. 인사나 나눠. 유순심(柳順心)이라 혀."
상모를 그대로 쓴 여자가 상쇠 어른 뒤에서 쓱 나타나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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