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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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묘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28 14:36
  • 호수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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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상강은 절기상으로 24절기 중 18번째 위치한다. 이때부터 서리가 내리는데, 한낮의 햇살은 그럭저럭 짱짱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찬 기운이 감돈다. 찬이슬을 맺기 시작하는 한로와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동 사이에 끼어 있는 만큼 가을의 마침표이자 겨울의 전령사에 해당하는 셈이다.
대기 온도가 빙점 이하로 떨어지면 공기 중의 수증기가 지표면이나 물체 표면에 닿을 때 물방울이 되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이것이 바로 서리다. 그런데 서리 결정체는 눈 결정체와 더불어 심미적 대상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꽃과 풀잎에 살포시 내려앉은 투명하고 순수한 결정은 볼수록 신비롭고 매혹적이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유년의 어느 아침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유리창을 덮은 서리 더께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손가락 낙서를 하는데, 집게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귓전에서 부서졌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농작물은 보통 서리가 내리면 맥을 못 춘다. 그러니 햇살이 쇠락하기 전에 가을걷이와 갈무리를 마쳐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농촌의 최대 농번기 가운데, 오월은 벼 심기와 마늘 수확으로 분주하고 시월은 벼 수확과 마늘 파종으로 눈코 뜰 새 없다. 그래서 콤바인· 트랙터· 로터리· 트레일러· 로더· 비료 살포기· 퇴비 살포기· 탈곡기· 랩핑기· 결속기 등 평소라면 보관창고에서 잠자고 있을 농기계들이 총출동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줄지어 굴러가는 광경은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올 봄 헐한 수매가에 의욕을 상실한 마늘 농가들이 농사를 아예 작파할 생각인들 왜 안 해 봤겠는가. 차마 멀쩡한 땅을 놀리지 못하고 억지춘향으로 다시 부치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할 턱이 없다. 어쨌거나 상강 절기 즈음에는 `부지깽이도 덤벼들 만큼 바쁘다`는 속담이 무색하지 않게 논밭을 바삐 오가야 한다. 일본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쁘다`라고 표현한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점차 물든다. 설악산을 시작으로 성큼성큼 남하하는 중이며 이달 말쯤 절정을 이룰 전망이다. 밤낮의 온도 차가 클수록 단풍색이 곱다는 것은 상식이다. 알록달록한 물감이라도 뒤집어쓴 듯 단풍물이 곱게 든 전국 단풍 명소마다 인파가 몰리고 있다. 이쪽 지역은 산에 활엽수가 많지 않아 단풍을 감상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아쉽다.
역대급 태풍이 몇 차례 훑고 지나가서인지 대기는 어느 때보다 쾌적하다. 이례적으로 가을에 집중된 태풍 `링링` `미탁` `하기비스`에 대해서는 사전 예고 때부터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예상대로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부터 소멸할 때까지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풍은 물러났고, 천연덕스러울 만치 맑고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무심히 떠다닌다. 그리고 그 아래 울긋불긋 단풍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길을 걷다 발끝에 채는 낙엽만 봐도 사색에 잠기게 된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도 예외 없이 숱한 사건과 사고, 숱한 슬픔과 기쁨, 숱한 만남과 이별, 숱한 탄생과 죽음으로 점철돼 있다. 다만 그 어떤 것도 시간과 대적하지는 못했다. 도시 밤거리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과도 같이 시시각각 출몰과 부침과 흥망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리하여 문득문득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그리움이나 회한은 있을지라도 대개의 기억들은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점점 저편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잊어야 사느니 싶다가도,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잊히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이 가슴을 콕 찌른다.
쉼 없이 굴러가는 세월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 가을이 지나면 다음번 가을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사람도 올해 다르고 내년 다르듯 올가을과 내년 가을이 똑같을 수는 없다. 정녕 우리가 보고 듣고 아는 세상 모든 것이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이슬과 번개와 같은 것인지. 가을이 머무는 동안 사색의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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