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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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0.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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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진 │ 재부향우, 남면 임포
임  숙  진
재부향우(남면 임포)

연례행사인 조상님 산소 벌초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꽃밭등 돌방석에 앉아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일들을 추억하여 봅니다.
남면 임포마을 입구에 있는 꽃밭등은 낮은 산등성으로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경사길에서 얻은 가쁜 숨을 풀고 앞뒤 산과 들판의 경치를 음미하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길가까지 무성한 잡목들이 자라 거의 밀림 수준이지만 저의 어린 시절엔 산등성이 전체가 야생화 밭이었습니다.
꽃밭등은 이른 봄부터 민들레, 진달래, 엉겅퀴, 산찔레 등 많은 꽃들이 계절을 연결해가며 희귀한 곤충들을 불러들였고 가을엔 순백색의 구절초 향기에 도취된 크고 작은 벌들이 "왕왕"소리를 내며 겨울 준비를 하던 곳이어서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꽃이 많아 꽃밭등이란 지명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이 꽃밭등  한길 따라 학교 다닌 길도 이루어졌고 틈만 나면 또래끼리 소를 몰고 와 방사시켜놓은 채 돌치기, 자치기, 씨름 등으로 체력을 키우기도 한 곳이었습니다.
꽃밭등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서른일곱에 늦둥이로 나를 얻으셨던 어머니는 전답 오가는 길이나 바래길 등에서 항상 막내를 동행해 당신의 분신을 자연스레 아들에게 전수시켰고 때론 이 꽃밭등의 구절초를 캐서 푹 고은 물로 아들의 위장을 튼튼하게 다스리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봄비 내리는 초저녁이었습니다. 우장과 삿갓, 호롱불로 무장한 채 어머니와 나는 읍내 장에 다녀오시는 아버지를 마중하러 꽃밭등에 나갔습니다. 얼마 후 장에서 송아지를 몰고 오시는 아버지는 지친 걸음에 빗물과 진땀이 범벅된 얼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황급히 송아지 등에 우장을 받쳐주며 "이제부터 한식구가 되었으니 어미 생각 말고 주는 대로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거라" 하셨습니다. 그날 밤 송아지 고삐를 받아든 나와 양쪽에서 호위 무사인양 같이 걸으시는 부모님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마냥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젖 뗀 송아지는 엄마 찾는 울음으로 며칠간 난리법석입니다. 그때마다 주인의 지극정성으로 돌보면 어미 생각은 멀어지고 주인과 교감이 이루어지며 봄내음 물씬한 새풀과 때론 사람이 먹는 밥과 나물 등도 간식으로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송아지가 청년기에 들면 코를 뚫어 코뚜레를 채우고 아이들은 들로 산으로 소먹이를 나가게 되고, 어른소가 되면 목에 멍에와 쟁기를 채워 일소로 길들인 후 아버지는 다시 읍내 소전에 나가 웃돈을 받고 물물 교환을 하십니다. 장에 가실 때는 큰 소를 몰고 가서 올 때는 송아지를 몰고 오십니다.
지금은 기계화에 밀려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 농촌에선 젊은 일소가 최고의 몸값인 것을 아버지가 체험하신 최고의 수입 방법이었습니다.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장날 밤엔 부모님은 고단함을 잊은 채 밤새 도란도란 시간 가는 줄 모르십니다. 아버지의 웃돈 받은 소 값과 어머니가 모아오신 길쌈 돈이 합쳐져서 매물로 나온 동네 누구네의 전답을 살 것인가를 의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전답 흥정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산중 논을 싸게 사서 주변산을 개간하여 면적을 키우는 방법과 가까운 문전옥답을 살 때는 산중 논을 팔아서 목돈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앞뒤 방법 모두 부모님께서 살림을 늘리며 자식들을 키우시던 행복의 영역이었고 그 중심에 있던 막둥이는 늘 행복했습니다.
소를 방목해 놓고 만개한 민들레 씨앗대를 꺾어 바람에 날리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갈 데로 잘 가는구나. 사람도 때가 되면 민들레 씨앗처럼 멀리도 가고 가까이도 간다"라는 어머니의 애절한 노래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이는 아끼던 자식들이 공부나 일하러 객지로 나가거나 혼인을 해 출가외인으로 떠나는 헤어짐과 사랑과 이별 등을 함축한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의미를 채 몰랐습니다.
민들레 이야기가 있던 그해 늦가을에 이불보따리 짐 지운 나를 뒤 딸려 시집보내시던 막내  누님의 가마를 한없는 아쉬움으로 이곳 꽃밭등에서 지켜보셨습니다. 이곳 꽃밭등에서 읍내나 타동으로 가는 큰길 외에도 산으로 향하는 작은 사잇길은 공동묘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동에서 태어나 본동이 출가 외인지였던 어머니는 타지에서 시집오신 새색시들에게는 동네 지리와 풍습의 길잡이였고 수많은 동네 사람들과 엉키고 설킨 거미줄 유대가 있었습니다. 팔십 평생 그 많던 인맥들과 이 꽃밭등에서 헤어지면서 그분들의 마지막 상여채를 붙잡고 통곡하신 순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막내까지 6남매를 모두 민들레 홀씨처럼 날려 싹 틔워 놓고 자신의 차례인양 홀연히 가신 어머니. 그해 늦가을 꽃밭등 휴식이후 온화하신 영정을 앞세운 거룩한 상여가 의무인 양 공동묘지로 향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때가 되면 씨앗 날려 멀리도 가까이도 꽃피우는 민들레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귀갓길 차 속에서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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