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치자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상태바
제7장 치자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15 12:03
  • 호수 67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 임종욱

남해에는 꽃이 많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인지 모를 오래 전부터 남해는 지천으로 꽃이 피었다 졌다. 산바람과 골바람, 바닷바람이 아침저녁으로 계절마다 서로 비벼지면서 불어오는 남해는 꽃들이 살기에 가장 행복한 섬 마을이다. 그래서 남해 사람들이나 뭍에서 왔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남해를 두고 화전(花田), 꽃밭이라 입을 모았다.
그런 꽃들 가운데 이 땅 남해를 가장 빛내는 꽃을 들라면 `치자 꽃`이라고 다들 주저 않고 손을 들어준다. 치자 꽃은 치자나무를 숙주로 삼아 제 삶을 뽐낸다. 사람 키만도 못하게 자라 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치자나무는 상록수(常綠樹)다. 사시사철 푸른 잎이 떨어질 줄 모른다.
보통 치자 꽃은 봄에서 여름까지 그 절정을 이룬다. 봄이 올라치면 남해에도 개나리, 진달래, 철쭉, 유채꽃 등 별별 꽃들이 자태와 색상을 자랑하지만, 남해 사람들은 치자 꽃을 `고향의 꽃`이라 여겼다. 어쩌다 타지로 나가 살아도 울짱 틈 소담한 곳에 치자나무를 심었다. 치자 꽃이 피면 그 달콤한 향기에 향수(鄕愁)에 젖어 고향을 그리며 눈물짓곤 했다.
치자 꽃은 품종이 무엇이든 빛깔은 언제나 하얀색이었다. 그 흰 빛은 그저 색깔 중의 하나인 백색(白色)이 아니었다. 윤기는 띠지만 그렇다고 농염(濃艶)하지 않고 은은하면서 고즈넉한 품격을 지닌, 가슴을 여울지게 만드는 얼이 살아 있었다. 그 아릿함 때문에 한 번 치자 꽃향기를 맡은 사람은 숨이 막힐 정도로 매혹된다.
오늘 차상두는 햇살이 짱짱한 날 이어마을 대나무 움막으로 나왔다. 낮에 와 보니 대나무 울짱 주변 키 낮은 나무에 하얀 꽃들이 작은 눈송이처럼 박혀 눈부셨다. 차상두로서는 처음 본 꽃이라 이름은 몰랐지만, 향기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자극으로 다가왔다. 혼자 걸음이라 물어볼 이도 없어 차상두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판서의 별서에서 벌어질 춤굿 경쟁이 못 박히면서 구자효 상쇠 어른이 엄명을 내렸다. 땅 농사도 긴요하고 바다농사도 거를 수 없지만, 남해의 명예를 걸고 싸움판에 뛰어든 이상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고 외치셨다.
"우리 남해가 비록 조선 땅 남쪽 바다 외진 곳에 있다케도 우리들이라고 밸이 없지는 않다 아이가. 조상 대대로 뭍것들에게 섬놈이라고 당한 설움이, 생각만 해도 복받치는데, 우리의 자랑인 매구에서마저 진다면 우찌 얼굴로 들고 다니겠노. 더구나 뭍에서 올 춤꾼들에게 이 바닥에서 진다카믄 기냥 남해 바다에 코를 박고 죽어야할끼다. 우짜든동 이기야 얼라들헌티도 체면이 설끼 아이가.
다행히 정판서 어른도 남해 사람이라 대결은 붙였어도 지지는 말라켓다. 물심양면으로 지원은 아끼지 않겠다 켓시니 농사는 놉을 쓰든 일가붙이 도움을 받든 당분간 접어두고 기량을 다지는 일에 몰두해야 할끼라."
매구패 제일 어른이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춤꾼들을 다그치자 다들 긴장의 빛을 드러냈다.
술을 한 잔 걸친 방자가 기운이 뻗치는지 붉어진 얼굴로 목청을 다잡으며 춤꾼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들 들으셨지예. 우리 남해 사람들이 유배 온 양반이면 그 잘난 행세에 기가 죽었고, 벼슬아치들이 와서 조리돌림을 해도 끽 소리 못하고 살았다 아임니까. 섬놈은 사람이 아이라고 누가 캅디까? 요참에 뭍에서 올 춤꾼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남해도 `사람`이 사는 시상인 걸 상구 한 번 보이조야지예. 안 기렇심니까."
방자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맨주먹을 휘젓자, 처음엔 주눅이 들었던 매구패들의 눈동자에도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평소 새침하던 유순심마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상쇠 어른 말씸이 백 번 옳다 않임니까. 춤굿 쌈에서 이긴다케도 돈이 생기고 떡이 생기지야 안켓지만……"
갑자기 방자가 유순심 말을 가로막으며 훌쩍 뛰어나왔다.
"무신 소리! 떡은 몰라도 돈은 생길 거라 사료된다카이. 만석지기 정판서께서 설마 상급(賞給)도 업시 쌈판을 만들지 않았을끼라 이 말이제. 그라지예, 상쇠 어른."
입바른 소리에 상쇠 어른이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방자 말이 다 사실은 아니라케도 아주 잡치는 소리도 아니제. 청지기가 판서께서 이기는 패에게 전답 다섯 마지기를 내놓겠다 다짐했다고 귀띔을 해줬싱께. 그것땜시롱 이기야 하는 건 아이지만, 우리 땅 전답으로 남 좋은 일 시킨다믄 말이 안되제. 하모!"
방자가 나서는 통에 말이 끊겨 머쓱해졌던 유순심이 다시 말을 받았다.
"그라몬 더욱 잘 된 일이지예. 그 전답으로 우리 매구패 살림 밑천을 삼으몬 얼매나 좋컷심니까. 조래중 아지매가 연신 때마다 참 걱정으로 근심이 마를 날 업신는데, 다 옛 소리가 될끼라예."
이말심 아지매가 국그릇에 매운탕을 옮겨 담으면서 한 마디 거들었다.
"하모, 하모. 내사 이제 다 늙어빠져 매운탕 거리도 못 되지만서도 전답 다섯마지기라몬 그서 나올 이문만으로도 괴기는 끊이지 안체. 거기 쭈그려 안진 영감님들, 말만 들어도 가운뎃다리에 힘이 뻗치지예, 우하하핫!"
영기와 농기(農旗)를 들고 매구판 선도 역을 맡은 노인들이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을 드러내면서 찰진 웃음으로 대꾸했다.
"말심아. 그러다 내 못 참고 밤에 너거 집 담장 넘으몬 책임질끼가?"
이말심 아지매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담장 넘을 힘이나 있고 고런 소리하쇼! 이래뵈도 내도 아직 싱싱햐."
걸쭉한 외설담(猥褻談)이 오가자 사방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 매구패들은 술과 고기로 배를 가득 채웠었다.
쪽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순심이 먼저 나와 기물이며 깃발, 복식(服飾)들을 챙기고 있었다.
"왔나? 좀만 기다리래이."
차상두를 흘낏 보더니 유순심은 다시 기물 정리에 혼을 빼앗겼다. 차상두도 더 할 말이 없어 무덤덤하게 상모를 쓰고 생피지를 돌렸다. 걸음을 빨리 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몸이 땅에 닿을 듯이 눕혀 모잽이 돌 듯 흉내를 냈지만, 성에 차는 몸짓은 아니었다.
구자효 상쇠 어른이 그날 헤어질 때 차상두와 유순심을 불러 일러둔 말이 있었다.
"단디 들으래이. 상두 니가 젊고 몸이 날래니께 연풍대(筵風擡) 춤사위 한 자락을 맡았시몬 좋켓다. 알것제?"
연풍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그게 뭔데요?"
"모리나? 갱기도에선 그걸 다리고로 부리나?"
"제가 매구는 해본 적이 없어서요."
차상두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맹칭이야 중요하것나, 잘 하믄 그만이제. 여그 순심이가 제법 하니께 다음부터라도 배워여. 순심이하고 방자, 상두 셋이 버꾸함시롱 연풍대로 돌믄 제법 갱치가 화려할끼다. 그랑께 북도 치면서 소고도 익혀야 혀."
유순심이 차상두를 앉히더니 잠시 연풍대 사위를 보여주었다. 유순심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상모를 돌리고 몸도 가뿐히 뒤틀면서 날아갈 듯한 춤사위를 흥겹게 놀았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이제 갓 상모돌리기와 장단, 과장 움직임을 널뛰듯 맞춰 가는데 저걸 또 하라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런 걸 어떻게 한 대요?"
차상두가 감탄하며 묻자 유순심이 생끗 웃으면서 말했다.
"이거는 약과다. 열두 발 상모 돌리는 걸 보면 뒤로 나가자빠질끼다."
"그런 것도 있어요? 무섭네요."
"걱정 할 것 없어야. 상두 니라몬 허고도 남을 긴께."
그래서 오늘 남들보다 일찍 나온 거였다. 연풍대 흉내를 내다 업어지고 자빠지는 꼴을 남들에게 보이기는 싫었다. 차상두는 소고로 길놀이 장단을 두드리놀면서 유순심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씨구, 잘도 노네. 수버꾸를 맡아도 되것어."
누군가 추임새를 넣기에 돌아보니 방자가 어느새 쪽문을 열고 들어와 있었다. 정자집 도령님 곁에 있어야 할 양반이 웬일인가 싶었다.
"도령님은 어쩌고요?"
방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도령님이야 홍이 아씨하고 잘 놀제. 그 판에 내가 끼서 뭘 허끼고. 욕만 태백이로 먹제."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댔다.
"그런 니는 이 시각에 여기 있어도 되남? 니 또 사라ㅤㅈㅣㅆ다고 개고집 포교가 길길이 날뛸 텐디?"
방자는 조옹집 포교를 `개고집`이라 불렀다. 성깔이 더러워 한 번 삐딱선을 타면 다구리가 심하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박태수 포교님께서 가라 했시다."
차상두도 제법 남해 사투리가 입에 올랐다.
"그려? 우리 태수 형님은 도량도 참 넓으셔. 선덕여왕 같은 옥진 아씨와 사니께 그랄만도 하제. 크크크!"
방자의 말에는 항상 뼈가 숨어 있어 갈피를 잘 헤아려야 했다. 신라 선덕여왕의 성품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일가에게 해주는 걸 보면 분명 어질고 착한 여왕이었을 것이라고 차상두는 생각했다.
"왔는가?"
유순심이 소고를 옆구리에 끼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려. 상두서껀 연풍대 개르친담시? 어떻코롬 하나 귀경하러 왔제."
이런! 구경꾼이 하나 생겼다. 침을 꿀떡 삼키는데, 방자는 엉뚱한 말로 화제를 돌렸다.
"근디 순심아, 니 밖에 치자 꽃 핀 거 봤나?"
유순심의 얼굴에서 살짝 웃음기가 가셨다.
"봤제. 참 별 일이제?"
"하모. 가을도 꽤 깊은 이 철에 치자 꽃이 무신 일이것네. 냄시야 좋지만서도 괴이하기도 하제. 닌 전에 본 적 있나?"
오가는 말투로 보아 두 사람은 갑장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순심도 탑 마을에 산다고 한 것 같았다.
"없제. 우쨌거나 치차 꽃향기가 움집에 그득하니 좋기만 하네."
유순심은 별 일 아니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방자는 그리 느긋하지 않았다.
"꽃이 때를 넘겨 피면 천지에 변고가 있을끼라 카던데……."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