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고향, 보물섬 남해 학술심포지엄, `대장경과 일연 그리고 남해` 이렇게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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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의 고향, 보물섬 남해 학술심포지엄, `대장경과 일연 그리고 남해` 이렇게 보도합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9.11.15 16:06
  • 호수 6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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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일연선사로 팔만대장경을 본다`
최연주 동의대 사학과 교수, `분사남해대장도감과 정안의 역할`

팔만대장경의 고향, 보물섬 남해 학술심포지엄이 지난 8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회장 김정렬) 주최로 열렸다. `대장경과 일연 그리고 남해`를 주제로 한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1993년 불교방송에서 근무하면서 판각지로 추정되는 남해군 고현면 일대를 취재한 김정학 현 대구교육박물관장의 기조발제와 1994년 고현면 일대에서 진행된 남해분사도감 관련 기초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 고려대장경 판각과 정안에 대해 깊이 연구해 온 최연주 동의대 교수, 일연선사의 남해 관련 행적을 향토사적 입장에서 분석한 김봉윤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이 주제발표를 통해 고려대장경 분사남해대장도감과 일연선사를 재조명했다.
또한 최영호 동아대 교수를 좌장으로 한 토론회에서는 신라대 배상현 박사, 동국대 임종욱 박사, 조계종 교육원 고상현 박사가 참여해 주제발표에 대한 토론을 펼쳤다. 아울러 화방사 주지 성언스님과 김용태 남해군청 관광진흥담당관도 팔만대장경 관련 의견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본지는 이번호부터 네 차례에 거쳐 △일연선사로 팔만대장경을 본다(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분사남해대장도감과 정안의 역할(최연주 동의대 교수) △고려대장경 판각과 일연선사(김봉윤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분사대장도감의 고고조사 성과와 접근방법(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 △배상현, 임종욱, 고상현 토론자의 토론 내용 △화방사 주지 성언스님과 김용태 남해군청 관광진흥담당관의 남해비전, 고려대장경판각성지보존회의 인터뷰를 연차적으로 싣는다.
고려팔만대장경 판각지 남해를 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번 심포지엄 내용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당부한다. <편집자 주>


"일연선사 문도 9명은 대장경 각수였을 것"

고려대장경의 비밀, 일연의 남해시절로 풀 수 있다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 `일연선사로 팔만대장경을 본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선사가 남해에서 12년간 머물렀다는 사실이 심포지엄 발표에서 밝혀졌다. 인각사 일연선사(1206~1289)의 비문에 "정안이 1949년 남해 정림사 주지로 청했다"는 기록이 있어 일연선사가 고려재조대장경 조성에 `증의`, `교정` 등으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왔다. 여기에 일연비문에 나타난 일연스님의 많은 호(이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견명, 회연, 일연이었다.
선승으로서의 일연스님의 생애는 몽고군의 고려침공과 궤를 같이한다. 일연비문의 기록에 따라 일연스님이 남해도로 건너간 것은 그의 나이 마흔넷인 1249년. 정안이 사제(개인 저택)를 희사해 정림사를 꾸미고 일연을 정림사 주지로 청한다. 8년 뒤 같은 섬 안의 윤산 길상암으로 `한적`(閑寂)을 구해 이주한 기간을 합하면 일연은 12년 동안 남해도에 머무른 것이 된다. 윤산은 남해현의 별칭이다.  「중편조동오위」에도 `병진년(1256) 여름을 지나면서 윤산 길상암에 머물면서 원종 원년(1260) 12월 8일에 봉소헌에 남아 회연이 서문을 쓰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초조대장경의 소실(燒失)을 안타까워하고 대장경 판각 후 그것을 증의했으며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의 주맹을 맡는 등 대장경과 깊은 인연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문헌학적 근거로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역사기록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고려사」에 있는 제도감각색조에는 왜 대장도감만 빠져 있을까? 이 때문에 대장경판각사업을 담당한 이들의 소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 `증의` 또는 `교정` 담당자가 있었으리라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둘째, 「고려사」에 일연의 이야기와 정안의 후손들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셋째, 당시 역사서에 정림사와 분사도감의 존립연도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유는? 넷째, 대장경 판각기간과 분사도감을 포함한 대장도감의 존립기간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오류가 아닐까?… 이외에도 더 많은 질문들이 있다.
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는 게 매우 어렵지만 여러 학문들이 회통한다면 많은 부분들이 규명되리라 생각한다.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인각사 비문 음기에서 9명의 이름이 고려대장경의 각수 이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고려대장경 각수의 이름은 「고려대장경 조성명록집」을 참고해 일연비문 음기 164명의 스님 명단을 3600명의 각수명과 대조했다. 그 결과 9명(혜여, 양지, 도한, 지현, 법기, 가홍, 현조, 효대, 득심)의 명단이 비문 음기의 법명과 일치했다. 범기, 양지, 지현이 각각 1장만 새긴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6명이 새긴 판각량은 총 532판에 이른다. 1인당 평균 90판에 해당한다. 총 경판수 8만 장을 3600명의 각수가 새겼다면 1인당 평균 22장 안팎일 것으로 추정되는 걸 고려하면 이 6명의 숙련도와 전문성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일연선사의 문도로 추정되는 이 9명의 각수의 이름이 드러남으로써 고려대장경 판각이 마무리된 1249년과 일연비가 세워진 1295년은 46년의 간극이 있지만 일연의 방대한 저술, 남해분사도감에서의 판각과 증의, 운해사에서 열린 대장낙성회 주맹의 역할과 관련된 여러 의문이 함께 풀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안, 대장경 각성사업 핵심 역할 했을 것"

최연주 동의대 사학과 교수, `분사남해대장도감과 정안의 역할`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의 조성은 고종 23년(1236)에 시작되어 38년(1251)에 마무리됐다. 각성사업을 주관한 공적 기구는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하 분사도감)이다.
 대장도감은 임시수도였던 강화경에 설치·운영되어 기획 등 정책 업무와 경판 조성 등을 주관했고 이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분사도감의 설치 장소 등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분사도감이 설치·운영된 장소로 밝혀진 지역 중 하나가 경남 남해군인데 그 근거 자료는 고려대장경에 편제된 「종경록」 권27의 간기이다.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라는 간기를 통해 남해가 분사도감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판각 추정지로 예상되는 구체적인 장소를 대상으로 지표발굴조사를 몇 차례 했으나 그 비밀을 밝혀줄 결정적인 고고학적 유구나 유물이 조사되지 않아 그 실체 규명은 추후과제로 남아 있다.
 분사도감에서 산출한 경전의 종수는 83종 637권이다. 각 권의 간기 표기를 분류해본 결과, 표기 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은 분사도감이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는 점을 추론할 근거가 된다.
 기존 분사도감에 대한 실제적 내용은 「종경록」 권27의 간기를 통해 분사남해대장도감의 실체를 이해하고 있었으나 근자에 개령분사대장도감의 실체가 밝혀졌다. 이는 기왕에 제기된 분사도감의 분산 설치를 뒷받침해주는 주요 근거다.
 그리고 남해와 개령에 각각 설치된 분사도감에서 조성한 경정에서 동일한 각수가 조사되어 인적 자원의 공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30년(1243)부터는 경판을 직접 판각했으며, 상황에 따라 필요한 자원을 수급하며 탄력적으로 운영했다. 경북 개령과 경남 남해에 설치된 분사도감은 사업의 효율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독자적인 체계를 운영한 게 아니라 상호 교류하면서 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안은 하동 정씨로 3대에 걸쳐 고위관료를 배출한 집안 출신이다. 최이(최충헌에 이은 고려무신정권의 최고집정자)는 정안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국자감 좨주로 활동하던 정안은 최이의 전횡을 보고 해를 피하기 위해 남해로 물러났다. 정안의 남해 퇴거는 최이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갈등과 연관돼 있다. 그가 남해로 물러난 시점은 고종 30년으로 추정된다. 이후 8년 동안 남해에서 주로 활동한다.
 고종 36년 정안은 남해에 있던 사제를 희사하여 정림사라 이름하고 일연선사를 주지로 청했다. 남해의 개인 저택은 각성사업이 마무리된 직후에 정림사로 개창한 사실, 일연선사를 모셔온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정안의 주요 활동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안의 남해활동은 고려대장경 각성사업과 연관성이 깊이 주목된다. 사업이 마무리되는 고종 38년에 정안은 최항(최이의 서자)에 의해 자문하성으로 발탁됐다. 고종 30년부터 38년까지 정안의 남해활동은 각성사업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종 30년 대장도감뿐 아니라 분사도감에서도 경판을 판각했음을 고려할 때 정 안은 대장도감이 있던 강화경과 원거리인 진주 및 남해의 분사도감을 이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안은 경제적 분담은 물론 사업이 원만하게 마무리되도록 하동과 남해를 중심으로 한 여론 형성, 각종 물자조달 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정안의 이러한 역할로 분사남해대장도감은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 등을 극복하고 고려대장경 각성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가용한 인적·물적 자원은 정안의 남해활동 및 정계 복귀 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요약·정리 김수연 기자 nh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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