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남해는 소가야(小伽耶)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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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남해는 소가야(小伽耶)였는가?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18 11:00
  • 호수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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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군 기록이야기 13 │ 여창현 남해군 학예연구사
여  창  현남해군 학예연구사
여창현 │ 남해군 학예연구사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은 전기가야(1~4세기)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후기가야(5~6세기)의 맹주로 군림한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의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다. 대가야의 위용에 비해 상대적인 약소 세력으로 불린 `작은 가야`가 현재 고성지역을 기반으로 번성한 소가야(小伽耶)이다.
소가야는 「삼국유사」를 남긴 저자가 인식한 당시의 상황과 함께 개인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된 `어떤 가야`라는 관념에서 이름 지어졌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송학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고성의 소가야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남해는 당시 소가야의 일원이었던 것일까.

남해의 옛 지명과 남겨진 가야시대 무덤들
남해의 옛 지명 중 가야시대 남해를 일컫는 말은 남아 있을까. 룗일본서기룘 계체기 9년 4월 `물부련이 대사강에 머물 때 반파의 공격으로 도망하여 문모라(汶慕羅)에 정박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문모라를 남해도 등으로 추정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초음리 고분군 돌덧널무덤 출토 유물(고현-이동간 국도확포장건설공사)
초음리 고분군 돌덧널무덤 출토 유물(고현-이동간 국도확포장건설공사)

「일본서기」는 720년 왕명으로 편찬된 편년체 역사서이며, 이를 흔히 일본 정사(正史)의 효시로서 손꼽는다. 7세기 말 천황 중심 국가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데에 편찬의 초점이 놓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해당 지명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는 전해지지 않은 룗일본서기룘 찬자가 채록하여 남긴 당시 남해도의 옛 지명인 것이다.
`가야사 연구복원`이 국정과제로 추진되면서 가야의 주요 세력을 대표하는 고총고분 위주의 조사연구와 복원정비 사업이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접근방법과 경향은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야사를 정립하는 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분위기인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가야 권역이라 추정되는 곳곳에서 진행된 발굴을 통해 고고자료(考古資料)들이 적지 않게 축적되었다. 하지만 남해지역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알려진 가야시대 무덤이 전무한 실정이다.
2018년 비지정 고분군 실태조사에 따르면 남해군에서 확인된 삼국(가야)시대 고분군은 남치리 고분군, 성산 고분군, 우물 고분군, 물뫼 고분군 4개소이다. 고현면 남치리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석실묘(돌방무덤)로 알려져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나머지 고분군들은 아직 명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소가야의 굽다리접시(유배문학관 소장)
소가야의 굽다리접시(유배문학관 소장)

소가야를 말해 주는 유물들
지난 2018년 10월 남해 고현-이동 국도건설구간 내 이동면 초음리 일원에서 주민에 의해 가야토기가 채집되어 발굴조사되었다. 공사에 의해 고분군의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석곽묘(돌덧널무덤) 1기가 조사되어 유적의 성격을 밝힐 수 있었다.
석곽묘 내에서는 목긴항아리 1점, 뚜껑 1점, 쇠도끼 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목긴항아리는 소가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는 토기 양식(樣式)이다. 무덤군 중에서 1기의 무덤만 발굴조사되었지만 남해지역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남을 것이다.

소가야의 목긴항아리(유배문학관 소장)
소가야의 목긴항아리(유배문학관 소장)

필자는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 외에도 지역주민에 의해 채집되거나 기증받은 유물이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남해 유배문학관 수장고를 들른 적이 있다. 수장고 안에는 남해지역에서 채집된 가야시대 토기가 다수 보관되어 있었으며 특히 소가야 토기로 볼 수 있는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등이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해는 가야의 고도인 김해나 후기가야의 강력한 세력이 웅거했던 창녕, 함안, 합천, 고성 등에 비해 알려진 실체가 전무한 실정이다. 소가야의 고지인 고성지역과 서부 경남지역에서 발굴조사된 고분군들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들과 유사한 토기양식을 가진 세력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남해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교역의 창구인 항구, 농업생산력의 배경이 되는 가경지, 철 생산지 등이 확보되지 않아 가야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남해는 활발히 발굴조사가 진행된 다른 지역에 비해 구제발굴을 통해 1건의 가야시대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베일에 싸인 남해의 가야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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