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치자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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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치자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18 17:29
  • 호수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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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아침에 비가 잠깐 내린 가을 어느 날, 점심 요기를 마치자 권문탁은 방문까지 닫아걸고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그릇을 부시면서 홍이는 정자집 도령님의 침묵이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아침에 박태수 포교가 반쯤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 홍이까지 내쫓으면서 도령님과 밀담을 나누었다.
남의 엿듣는 걸 당연히 피하는 홍이였지만, 얼핏 오빠 이름을 스쳐 들려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또 오빠가 말썽을 일으켰나 싶었다. 근래에는 오빠도 마음을 잡은 듯 부역에도 부지런히 나갔다. 돌아와서도 잠자코 벽에 기대 뭔가 그림이며 글씨가 쓰인 백지를 들여다보며 궁리를 하는 눈치여서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어느 날인가 곤히 잠을 자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실눈을 뜨고 보니 오빠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기색이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잠시 옆자리 동태를 살피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오빠를 뒤따랐다. 무슨 짓을 하든 말려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뒤편 언덕에 오른 오빠는 벙거지를 쓰더니 빙빙 돌리는 것이었다. 달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이는 흰 띠가 벙거지 위에서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상모인 줄 알았다. 전에 정자집이 다 지어졌을 때 이웃동네 매구패들이 와 돌리던 기억이 났다. 엉덩이와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까딱이면서 용을 쓰는 오빠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매구에 빠진 오빠를 보고난 뒤 홍이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오빠를 매구패에 데려간 사람이 박태수 포교인 줄 알자 너무나 고마웠다. 어쨌거나 오빠는 연안 차씨 집안 대를 이을 종손이었다.
박태수 포교가 홍이에게 농담 인사도 하지 않고 허위허위 대나무 숲을 돌아나갔다. 차탁(茶卓)을 치우러 들어갔더니 국화차는 들여온 그대로 식어 있었다. 도령님은 벽에 걸린 <심우도(尋牛圖)> 그림만 바라보며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공연히 기분이 쓸쓸해져 홍이도 말없이 차탁을 들고 나왔다.
요즘 계속 안색이 어두웠던 도령님이었다. 홍이가 헤아려보니 유배 온 부친을 따라 남해에 왔다는 친구 분이 다녀간 이후부터였다. 그 부친이 관아 옥에서 끝내 유명(幽明)을 달리 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령님은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가묘로 달려갔다. 옥진 아씨에게 부탁해 급히 마련한 제수 바구니를 이고 망운산 어둔 기슭에 차린 가묘로 갔다. 도령님은 친상(親喪)이라도 당한 듯 호곡하며 흐느꼈다.
들썩이는 어깨가 너무나 수척해보여 가슴이 먹먹해졌다. 돌아가신 어른과 어떤 사이인지 홍이로서는 알 길 없었지만, 도령님을 지탱한 한 세상이 무너졌음을 느꼈다. 얼마 뒤 친구 분은 초라한 운구를 이끌고 노량 바다를 건너 길을 떠났다. 살아서 건너온 해협을 죽어서야 귀향하는 행렬을 도령님과 함께 지켜보면서 홍이에게 바다는 고향과 자신을 가르는 암굴(暗窟)인 것 같았다. 슬픔은 고향에 다 두고 온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그들 일가와 함께 남해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그 이후로 도령님은 말수가 부쩍 줄었다. 마시지도 않던 술까지 받아오라는 분부마저 잦아졌다. 오늘도 도령님은 바깥나들이를 간다는 핑계로 옥진 아씨의 주점에 들러 받은 술을 홍이에게 들렸다.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날씨는 서럽게도 맑았다. 새소리를 벗 삼아 들길을 걷던 도령님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을 올랐다. 들기름으로 지진 고소한 생선전을 안주 삼아 도령님은 홀로 술잔을 비웠다. 과거 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할 사람이 술이 있어야만 들어낼 수 있는 시름은 무엇인지 홍이는 궁금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던 도령님이 문득 고개를 모로 저으며 무언가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붉어진 얼굴로 권문탁이 홍이를 쳐다보았다.
"홍이야, 이 향기 너도 맡았니?"
잠시 넋 놓고 먼 생각에 잠겼던 홍이가 그 말에 퍼뜩 이승으로 돌아왔다.
"무슨 향기 말씀인가요?"
홍이도 권문탁처럼 푸른 소나무 가지 사이로 눈길을 주며 냄새를 더듬었다. 상큼한 송진 냄새는 들려왔지만, 권문탁이 말한 향기는 다른 곳에서 풍겨오는가 보았다.
"처음 맡는 향기로구나. 꽃향기인 듯한데, 아, 저건가?"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권문탁은 쑥부쟁이가 무리지어 피어있는 언덕길로 향했다. 연한 자줏빛을 띤 가냘픈 쑥부쟁이 꽃으로 인사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아냐. 이 냄새가 아니야. 어디지?"
권문탁은 천렵을 나와 고기를 좇는 아이처럼 숲을 휘저으며 부산하게 걸음을 옮겼다. 애써 빨아 다린 옷에 풀물이 들까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던 권문착이 탄성을 지르며 홍이를 불렀다.
"홍이야. 이 꽃에서 나는 향내 좀 맡아봐라.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옥산(玉山)의 선도화(仙桃花) 냄새도 이렇게 달콤하진 않을 것 같구나. 이 꽃 이름이 뭘꼬? 홍이 꽃인가? 하하하!"
너무나 과장된 웃음소리라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후다닥 달려갔다.
"봤니? 하얀 옥구슬을 얇게 마름질해 모아놓은 것 같구나. 칭얼거리는 갓난애 주먹도 안 되는 꽃송이가 앙증맞기 그지없구나. 향기가 비단 실오라기처럼 은은하더니 예 오니 옹달샘 물처럼 촉촉하게 몸을 감싸는구나. 이 꽃 이름이 뭘까?"

홍이도 눈여겨보지 못한 꽃이었다. 고향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쇤네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대꾸를 원한 것은 아닌지 권문탁은 하얀 꽃 두어 송이를 꺾더니 홍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와 봐."
권문탁의 손짓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어쩌시려고요?"
"걱정 말고 이리 와라. 내가 너를 해치겠니."
엉거주춤 다가가자 권문탁이 홍이의 어깨를 잡더니 자리에 앉혔다. 꽃나무가 사방을 가려 푸른 하늘밖에는 남지 않았다.
권문탁이 곱게 땋은 홍이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술 냄새에 섞여 남자의 몸에서 나는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홍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권문탁은 홍이의 귀밑털 위로 하얀 꽃송이를 살포시 꽂았다. 도령님의 손끝이 홍이의 귀를 간지럽혔다. 홍이의 온몸은 가녀린 떨림으로 허덕거렸다.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너무나 곱구나. 꽃도……너도……."
차마 눈을 뜨지 못하는데 감은 눈앞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리고, 도령님의 입술이 느껴졌다. 밀쳐내려 했지만, 남자의 손길은 완강했다.
"도련님, 이러시면……"
간신히 입술을 떼고 도령님의 뺨을 밀어냈지만, 남자는 두 팔로 홍이의 어깨와 허리를 뱀처럼 조이며 입술로 입술을 막았다. 그 결에 두 사람은 이운 풀 위로 쓰러졌다. 새떼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원앙새였다. 비익조(比翼鳥)였다.
몸이 천 길 낭떠러지 위를 날고 있는 듯했다. 허공을 하염없이 오르다가 바닥없이 떨어졌고, 다시 그네를 타듯 하늘 위로 구름 위로 치솟았다. 거대한 불기둥이 나타나 홍이의 몸을 달구었다. 갑자기 눈물지으며 손짓하는 엄마의 얼굴이 다가왔다. 엄마는 어서어서 이리로 오라며 소리 없는 함성을 외쳤다. 홍이도 가고 싶었지만, 오금이 저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대로 허공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홍이의 머리에서 떨어진, 꿀물처럼 달콤한 꽃향기가 홍이의 몸 위를 떠다녔다. 숨죽여 아픔이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세상에는 아무 것도 머물지 않았다. 홍이도 도령님도, 꽃향기조차 모두 사라졌다. 홍이를 더듬는 한 남자의 손길만 세상을 오롯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구름이 해를 가렸다가 이윽고 다시 빛이 세상을 따뜻하게 덮었다.
눈을 떴을 때 도령님은 햇살보다 더 환한 얼굴로 홍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도 없고 환희도 없는 물빛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에는 뜻밖에도 분노가 서려 있었다.
권문탁은 홍이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다정한 손길로 재웠다. 홍이는 발그레 달아 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눈길을 바로 둘 수 없었다.
"홍이야, 괜찮니?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가 너무 몰아댔구나."
도령님은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홍이는 옷고름을 급히 매만지면서 몸을 뒤로 돌렸다. 뭐가 안 되고, 뭐가 성급한 것일까? 그러면 뭐가 되고, 언제가 때가 맞는 것일까? 갑자기 버림 받은 강아지가 된 기뿐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도령님은 홍이를 가지지 않았다. 남녀가 사랑할 때 엮는 마지막 몸짓을 매듭짓지 않았다. 홍이는 혼란스러웠다.
미궁에 빠진 사람은 홍이만이 아니었다.
"홍이야. 난 요즘 길을 잃어버린 것 같구나.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저 너만 보이는구나. 나도 무지렁이 평민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권문탁은 여전히 등 돌린 홍이의 어깨를 감싸듯 매만졌다. 그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너무나 아쉬운 온기였다.
"너를 이런 들판 귀퉁이에서 야합(野合)하듯 안으려 하다니, 원앙금침을 깔고, 청사초롱 밝히고,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가시버시가 되지는 못할망정……"
권문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홍이는 속상했다. 야속했다.
`도련님. 그런 말씀 마시고,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세요.`
이렇게 외치면서 도령님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
그것이 하늘도 비웃을 망상일지라도 도령님의 색시가 되고 싶었다.
홍이의 속내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권문탁은 입술을 다문 채 홍이의 어깨를 자신의 가슴께로 당겨 안았다. 홍이의 등으로 도령님의 일렁이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전해졌다. 심장은 홍이의 모든 것을 담으려는 듯 꿈틀거렸다.
"오늘 네게 못 볼 꼴을 보였다만 내 마음은 이제 변하지 않아. 그것만은 알아다오. 오늘부터 홍이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야. 알겠니?"
권문탁이 홍이의 몸을 돌려 온전하게 가슴 속 깊이 여자를 품었다. 권문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 하나가 홍이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권문탁의 혀끝이 홍이의 귀를 달콤하게 핥았다.
그러나, 여전히 홍이는 기쁨보다는 가눌 길 없는 슬픔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이승의 모든 길이 다 끊겨버린 두려움만 물결쳤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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