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악마의 속삭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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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악마의 속삭임 1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22 17:04
  • 호수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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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남해현은 남쪽 변방 해안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기지다. 고려시대 이후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경비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는데, 이 허점을 노리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특히 일본에 소굴을 둔 왜구(倭寇)는 시도 때도 없이 침략해 약탈과 살육을 일삼아 두고두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왜군(倭軍)에게 호되게 당했고, 민중들이 앞장 선 의병(義兵)이 없었다면 사직이 무너질 뻔한 적도 있었다. 왜란 이후로 조정은 중국의 대국 명나라나 청나라를 제외한 모든 외국에 대해 더욱 철저한 쇄국의 태도를 견지했다. 적군의 내습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자는 방책이었지만,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조선을 청맹과니로 만들어 문화와 경제를 낙후시키는 원흉이 되기도 했다.
남해현은 수군의 거점이면서 현령의 통제도 받다보니 주민들이 받는 고통은 두 배로 늘었다. 수영(水營)에서 요구하는 부역과 공출에 동원되어야 했고, 공물(貢物)을 거둔다는 미명 아래 벌어지는 관아의 착취에도 시달려야 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친 남해현은 각종 해산물의 보고이기도 했다. 특히 남해에서 나는 전복은 품질이 좋아 공납의 일등 상품이었다. 그러나 전복을 캐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과도한 물질로 건강을 상한 주민들은 힘없이 쓰러져갔다. 이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리는 없었고, 간혹 유배 온 사람들만 그 참상을 기록할 뿐이었다.
탐욕스런 현령이라도 만나면 공물의 부과량이 몇 배로 늘었는데, 남해로 부임한 현령치고 탐관오리가 아닌 경우가 드물었다. 사실상 조선은 탐관오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가을 환곡 공납이 한창인 관아의 곡식 창고 앞에서 `개고집` 포교 조옹집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예상만큼 환곡의 환수가 원활하지 않았다. 천 섬의 환곡으로 거둬들이겠다고 장담을 했지만, 현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쭉정이 쌀을, 그것도 모래가 반인 곡식을 내주고선 알곡으로 토해내라니, 그기 말이나 되는 소리요? 땅이 척박해 논 한 마지기에서 쌀 서 말이 나오는 기 고작인디, 환곡으로 다 털어 가면 우리더러 굶어 죽으라는기요? 차라리 내로 죽이고 가져가소."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주민이 있는가 하면 수확한 곡식을 빼돌려 감추어두고 배 째라는 치도 있었다. 일일이 뒤져 찾아내기에 관아의 인원이 부족한데다 잔꾀만 늘어난 주민들이 귀신도 찾지 못할 곳에 곡식을 숨겨두어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수심에 젖어 장부에 수량을 기재하고 있는데, 현령 권진태가 어슬렁거리며 곡물 창고에 나타났다.
"어때? 일은 잘 되고 있는가?"
창고로 들어가는 쌀가마니들을 흘낏 쳐다보면서 권진태가 물었다. 조옹집이 현령을 볕이 따뜻한 곳으로 모시면서 오만상을 찡그렸다.
"예상만큼 수월하지 않습니다. 번연히 풍작인 줄 알고 있는데, 먹고 죽을 쌀도 없다면서 오리발이지 않습니까? 아예 곡식을 빼돌리고 발뺌하는 놈들도 있습니다."
희소식을 기대하고 창고를 찾았던 권진태가 혀를 끌끌 찼다.
"그거 낭패로군. 자네만 믿고 도성의 고관들에게 큰소리를 쳤는데, 약속을 어기면 내 체면이 뭐가 되나."
소태 씹은 표정이 되기는 조옹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요. 이놈들이 찍 소리도 못하게 혼쭐을 좀 내야겠습니다. 관아의 위명(威命)을 업신여긴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요."
권진태가 솔깃해진 눈빛으로 조옹집을 쳐다보았다.
"묘수라도 있는가?"
"본보기로 몇 놈을 족쳐야겠습니다. 마을에서 신망이 높은 장자(長者)를 골라 두들겨 잡으면 무지렁이 놈들이 알아서 입곡(入穀)할 겝니다. 제대로 된서리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입지요."
현령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 무지한 놈에겐 매질이 약이지. 자네만 믿겠네."
"동지 전까지는 천 석은 채울 테니 염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대감, 근자 항간에 떠도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권진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북쪽 변방의 민심이 흉흉하다는 소리는 들었네만……그거야 그쪽 방백(方伯) 수령들이 어련히 잘 처리하겠나. 내 코가 석 잔데 삼천 리 밖 일을 두고 수선을 떨 필요는 없겠지."
그러자 조옹집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아니옵니다. 책방 도령님께서 바깥나들이가 요즘 부쩍 잦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소인도 뭔 소린가 싶었는데, 알아보니 여기저기서 도령님을 봤다는 사람이 여럿이었습니다."
이 말에도 현령의 대응은 심상했다.

"내후년에 식년시가 있으니 긴장이 오죽 될까. 더구나 문탁이도 내 기대를 알 테니 부담도 적잖을 거고. 잠시 머리 식히느라 바람 쐬러 나가는 걸 두고 호들갑을 떨 건 없지.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어. 언제 한 번 기방에라도 보내 회포라도 풀어주어야 할까보구먼."
조옹집이 답답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소인이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나들이 때마다 항상 홍이에게 술병을 들려 남의 이목을 피한다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현령은 느긋하게 흥타령이었다.
"홍이라면, 그 정자집에서 시중을 든다는 계집 말인가? 장모가 따라도 여자가 치는 술맛이 좋다는데, 그 정도 풍류야 다반사지. 아, 아닌 말로 혼자 술병 꿰차고 명승지를 찾으면 그야말로 살풍경이 아닌가. 옳거니, 자네가 홍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데, 문탁이가 손이라도 댈까 걱정인가? 허허, 사람 참, 문탁이가 그렇게까지 정신 줄을 놓을 애는 아니야. 허허허!"
조옹집이 제 속뜻을 몰라준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의 수위를 높였다.
"옳은 말씀이기는 합지요. 허나 홍이가 밤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고 정자집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습니까? 어떤 계집이라도 다 사내 호리는 재주는 타고난다지 않습니까?"
그러자 권진태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처도 들이기 전에 첩질부터 한다면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엇나갔는걸. 여색에 빠지면 글공부에도 소홀해질 텐데. 호색(好色)도 제 애비를 닮았나? 그깟 계집 잠깐 즐기는 거야 흠 될 게 없지만, 완물상지(玩物喪志)라도 하면 큰일인데."
홍이를 두고 마치 이미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소리처럼 들려 조옹집으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현령의 자식이라 한들 다른 남자의 손때가 묻은 계집을 짝으로 들이기는 싫었다. 게다가 이런저런 풍문 때문에 조옹집은 사내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당장 보쌈이라도 해 끌고 와 제 여자로 만들고 싶었지만, 홍이 뒤에는 현령의 자식이 도사리고 있었다. 계집 하나 족치겠다고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감. 둘이 저러다가 정분이라도 나서 덜컥 홍이가 애라도 가지면 어쩌시렵니까? 무작정 떼 놓으려다가는 도령님의 상심이 크실 겁니다.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화근을 키우는 꼴이 될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도령님이 종년을 건드려 애까지 가졌다는 소문이 도성에 돌면 혼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합지요."
조옹집이 반 협박조 설득이 현령의 심중을 흔들었다. 권진태의 얼굴이 금방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뿔싸! 거기까진 생각 못했군. 문탁이가 그렇게까지 경거망동하지야 하겠느냐만서도, 단속할 필요는 있겠어. 거참, 사내가 계집을 탐한다고 불러 꾸짖을 수도 없고 난처한걸."
기분이 언짢은 듯 권진태가 땅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옹집이 속내를 드러냈다.
"하오니, 대감. 머뭇거리지 마시고 홍이 년을 정자집에서 빼내 소인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상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령의 명령이라면 제 년도 발악하지는 못할 게 아닙니까. 어떠신지요?"
조옹집이 기대감에 가득 차 귀를 쫑긋 세우고 현령의 하명을 기다렸다. 그런 조옹집의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권진태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권진태가 마른기침 끝에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게 직효가 있을진 모르나, 자네 말처럼 문탁이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어. 문탁이가 성정이 온순하긴 하지만 독한 구석이 있기도 하지. 홍인가 뭔가 그 계집을 못 내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일만 공연히 커져. 자칫 삐뚤어지면 과거고 뭐고 공염불이 될지 않겠나."
조옹집의 입가로 불안의 기색이 스쳤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불상사는 불원간 닥칠 듯한데요."
따지듯 물었지만 현령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일이니 자네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입에 담지 말게. 만약에라도 문탁이를 두고 망발을 뇌까리는 놈이 있거들랑, 앞뒤 사정 보지 말고 당장 잡아와 치도곤을 내게나. 비천한 것들이 상전의 일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맹랑한 짓거리지. 몇 놈 개 패듯 지져놓으면 헛소문도 잦아들 걸세."
`비천한 것들` 안에 자신도 포함되는 것 같아 조옹집의 기분도 불쾌해졌다. 그러나 시늉만은 공손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럽지요. 만사불여튼튼이라 했으니, 대감께서도 서두르셔야 옳을 듯합니다. 소인이 대감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아 송구합니다."
잠시 조옹집을 훑어보던 권진태는 한 마디를 던져두고 발길을 돌렸다.
"처분은 때가 되면 알려줄 테니 환곡 일에나 전념하게."
등 뒤로 찬바람이 휑하니 일었다.
조옹집은 기분이 더러웠다. 현령이 무슨 수작을 부려 둘 사이를 떼놓을지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결말이 아니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무작정 손 놓고 현령의 하명만 기다렸다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 내가 굼벵이가 아닌 걸 보여줘야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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