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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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22 17:19
  • 호수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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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15 │ 碧松 감충효
碧松 감충효
碧松 감충효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에 봉천(鳳川), 파천(巴川), 망운산(望雲山)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소재 이이명의 매부(梅賦)를 지은 곳과 적소도 봉천변 주변이었던 바 남해유배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망운산 자락이 <강진바다> 쪽으로 펼쳐놓은 이 봉천변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서포 김만중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그의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옮겨와 심어서 키운 곳도 적소로 추정되는 읍성의 죽산리 당산 매원 주변의 습감재(習坎齋)임을 생각할 때 남해읍내의 봉천변 주변은 남해유배문학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 기로소에 들겠다는 영조의 뜻에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형을 받아 1744년 8월 30일부터 1745년 1월 6일까지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300편이 넘는 한시를 남겼는데 그의 적소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내용이 있으며 거처의 죽림에서 대나무를 의인화해 지은 시가 많은 것을 보면서 그의 적소는 읍성의 동쪽으로 대가 많은 동네 죽산리가 아니었을까하는 짐작도 조심스레 해 보게 된다. 어떤 이가 쓴 남해유배문학 기행문을 보니 겸재 박성원의 적소를 읍성 죽림마을(죽산리)의 지금 남해대학 기숙사 죽림부근으로 적시하며 대가 무성한 담벼락 사진도 게재하기도 하였는데 어떤 역사적 기록에서 인용한 건지 그 곳에 무슨 유물이 발견되었는지 아니면 구전인지는 필자 자신도 알 길은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필자는 박성원의 시에 녹아있는 여러 심상으로 봐서 가장 근접한 마을은 오래전부터 죽림이 우거진 죽산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지은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의 적소도 읍성 남문 밖(현, 남해읍 남산동) 김시위의 집이었고 그 남문 밖은 다름 아닌 죽산과 연결된 봉천 상류쯤이다. 그는 54세 때인 영조 47년(1771년)에 홍문관 수찬, 부수찬을 지내다가 삭탈관직 되어 남해로 유배되어 왔다. 노량 나루에 접한 충렬사를 참배하고 싶었지만 신분상 이를 억제하고 남해읍으로 들어와 선소의 장량상동정마애비 앞에서 충렬사 헌시(忠烈祠 獻詩)를 읊어 그의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에 남기게 된다. 그는 천리 먼 길 낮선 곳에 귀양을 와서 살았지만 전직 고관의 금도와 기개를 잃지 않았고 청렴결백, 안빈낙도, 경륜과 충성심 등 그의 높은 지조를 읽을 수 있기에 이 글은 후세사람들에게까지 교훈을 준다. 후송 유의양은 대충 10편 정도의 남해문견록을 남기지만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올리는 것을 생략한다.
그가 남긴 남해문견록은 순수한 국문자에 의하여 최초로 남겨진 한글기행문체로 아주 소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이 당대의 거목들이 우리 고향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매한 경륜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킨 그 역사성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조정에서 유배객들에게 내린 `절해고도 위리안치`라는 형벌이 말해주듯이 말 그대로 우리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유배객들은 우리 고향 남해를 배경으로 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다른 데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우리 남해의 보물이다. 그러기에 남해의 인문학적 콘텐츠는 유배문학관과 노도 문학의 섬에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하리라고 본다.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 겸재 박성원의 시심이 바로 이 읍성의 죽림마을에서 발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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