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악마의 속삭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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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악마의 속삭임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29 17:07
  • 호수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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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차상두는 연풍대 익히기에 빠져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 처음 유순심의 뒤집기 재주를 볼 때는 언감생심 저런 재주를 부릴까 엄두가 나질 않았다. 몸을 땅에 붙이듯 휘젓고 재바르게 발을 놀리면서 상모를 돌리고 소고를 박자에 맞춰 쳐야 하는 연풍대는 신기(神技)라 불릴 만했다. 불가근(不可近)이었다.
그러나 차상두는 우직한 만큼 고집도 셌다. 한 번 도전하겠다고 작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들도 하면 나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연풍대는 의욕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큰 몸집은 연풍대를 하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혼자 연습을 하다 자빠지고 엎어져 연신 엉덩이를 찧었다. 한 번은 얼굴을 땅에 처박아 코피를 줄줄 흘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려니 했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
차상두의 수련을 지켜보던 유순심과 방자가 열 일 제치고 나섰다.
유순심과 방자의 연풍대는 격조와 율동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갸름한 몸매의 유순심이나 키가 낮은 방자는 연풍대가 제격이었다. 상모를 돌리면서 땅재주를 부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자, 니가 가운데 서서 우리로 따라해보래이. 처음엔 택도 없어 보이겠지만 요령만 익히면 우리맨치 되는 것도 금방이래이."
그렇게 세 사람이 어우러져 연풍대 숙달에 나섰다. 아직도 차상두의 연풍대는 서툴었지만, 다리가 엉키기는 해도 엉덩방아를 찧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게 그 날도 수련을 마치고 흐르는 땀을 닦고 있던 차였다.
움막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말심 노인이 사색이 되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매로 얼굴을 훔치던 방자가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아지매요. 접때 저승 간 빚쟁이가 살아 돌아와 목이라도 따겠다 켓소? 상구 저승사자를 본 얼굴이네. 불알 찼시몬 워낭소리가 버리들까지 울려퍼지겄소."
이말심 노인은 농을 받을 여유조차 없었다.
"이 시상아! 시방 고로코롬 헐거운 소리할 계제가 아니여. 큰일 났당께, 큰일 났어야."
이말심 노인이 새파랗게 질려 오금도 펴지 못하자 그제야 방자도 표정이 굳어졌다.
"우째 그렇소? 왜놈이라도 쳐들어왔소?"
이말심 노인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외쳤다.
"구, 구자효 상쇠 어른이 관아로 잽혀갔당께. 그 집 메누리가 들이닥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제 집만 개리키며 내로 끌고 가는 거여. 영문도 모리고 딸려갔더니, 상쇠 어른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관아 포졸들한티 얻어맞고 있지 뭐여. 애고, 법 업시도 살 어른을 어찌 고로코롬 두딜겨 팬디야!"
이말심 노인은 기가 막힌 듯 바닥에 주저앉아 두 발을 버둥거렸다. 세 사람 모두 벌떡 일어섰다. 방자가 상모를 잡아챌 듯 벗으며 물었다.
"이런 개씨부럴 놈들. 여즉도 그 자슥들이 집에 있소?"
"관아로 끌고 가는 걸 보구 일로 달려왔시니 시방쯤 심처이 어름까정 갔실기구먼. 시상에, 천하의 역적 죄인이라도 그리 토끼 몰 듯 끌고 가진 않을낀디, 이기 무신 변곤고!"
"알것소. 내 당장 달려가 알아볼팅께, 순심아, 니 어여 마을로 달려가 매구패들 다 불리모아라. 난 관아로 가 경위를 살피 봐야 쓰것다. 뭔가 오해가 있어도 단단히 오해가 있는 모양이여."
이말심 노인을 부축하던 유순심이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알것쓰야. 박태수 포교님부터 찾아뵈여."
차상두도 따라나섰다.
"형님. 저도 같이 따라가겠습니다."
방자가 차상두를 보더니 어깨를 눌러 앉혔다.
"아니여. 니는 빠지는 게 나을 듯싶구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집으로 가 있어여. 소식은 낭중에 홍이를 통해 알릴팅께 꼼짝도 말어."
그렇게 방자는 화승총에 맞은 멧돼지처럼 쏜살같이 사라졌다. 이말심 노인은 기어이 대성통곡을 터뜨렸고,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채 움집 쪽문만 쳐다보았다.
그날 밤 이어리 대나무 움집에는 매구패들로 북적였다. 화톳불이 여러 군데 켜져 대낮같이 밝았다. 다들 웅성거리기만 할 뿐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방자가 돌아와 이 어처구니없는 사달의 자초지종을 알려주기만 기다렸다.
업잽이 영감이 곰방대를 연신 빨다가 기어이 내팽개치고 일어났다.
"방자 이눔까정 잽혀갔나, 우찌 이리 소식이 더딘겨. 올 행팬이 못되믄 옥진이라도 보내 기밸할 수 있짢은가. 이러다 지레 말라죽겄어야."
다들 조금은 겁을 먹고 있어 업잽이 영감의 투덜거림에 곁말을 붙이지 못했다. 누군가 목이 마르니 탁배기라도 한 잔 걸치자고 떠들었다가 포수 아재의 지청구를 된통 먹었다.
"아, 이 판국에 술을 넘어가남. 조청을 먹어도 단맛을 모를 판인디. 상쇠 어른의 생사도 모리면서 참으로 태평일세."
"인명은 재천인디 그리 쉽기 죽것소. 관아에서 잡아갔시몬 그만한 사유가 있것지."
매구를 배우겠다고 굴러들어온 건달 놈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피둥피둥 찐 살에 밉상까지 잔뜩 붙어 씰룩거렸다. 제대로 하는 것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대다 날밤을 새더니 말본새조차 곱지 않았다. 개뿔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눈치까지 맹탕이라, 멀쩡한 남의 아낙을 과부인 줄 알고 집적댔다가 남편에게 얻어맞아 앞 이빨이 두 개나 부러진 갈가지였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포수 아재도 건달의 겉도는 소리에 언성을 높였다.
"찢어진 아가리라고 함부로 놀리지 말어. 어따 대고 인명재천 타령이여, 타령이. 한 번만 더 방정맞은 주둥이 놀리믄 내 확 갈바버릴겨. 에구, 못난 작것."
그래도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건달이 대거리를 이어갔다.
"핫바지 방구 새듯이 가는 기 인생 아니요. 언지 꺼질지 모리는 촛불 같은 인생, 술 한 잔도 못하요. 내 모가치 술도 분명 있실끼요."
말도 안 되는 넋두리를 늘어놓자 업잽이 영감이 끼어들었다.
"포수. 기냥 둬버려. 밖에서 새던 바가지가 집 들어온다고 멀쩡해지것는감? 살다보믄 밥값이 아까븐 화상도 있는 벱이제."
두 사람의 실랑이 덕에 매구패들은 잠시 화급한 근심을 잊을 수 있었다. 차고 스산한 바람이 화톳불의 불티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옥사에서 나온 박태수 포교는 홰나무 노거수(老巨樹)에서 시나브로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옥사 옆 포교방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분노를 참느라 앙다문 입술이 쉬지 않고 떨렸다. 방자가 주점으로 달려올 때까지만 해도 상쇠 어른에게 떨어진 참변을 알지 못했다. 관할 지역에 중죄인이 있으면 나포해오는 일은 기찰포교인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상급인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한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른을 타작하듯 드잡이해 온 것이었다.

조옹집 포교가 환곡 미명 아래 수탈한 볏섬들을 갈무리하느라 며칠째 관아에서 밤을 새고 간만에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이방이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은 환곡 독촉을 지휘하라 얼렀지만 차마 그 짓은 할 수 없어 귀가해버렸다. 한 잠 늘어지게 잔 뒤 옥진과 방에 앉아 한 잔 술로 피로를 가시려던 중이었다.
해질 무렵 옥사로 달려와 보니, 조옹집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방자는 관아 문턱부터 차단당했다. 옥졸 말이 현령을 만나러 동헌으로 갔다고 했다.
옥사 골방에 누워있는 상쇠 어른의 몰골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끙끙대기만 할 뿐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눈알이 확 돌아갔다.
"어떤 개빌어먹을 새끼가 무고한 백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여?"
주변을 잡아먹을 듯 둘러보며 외치자 옥졸이 잔뜩 몸을 움츠리며 대꾸했다.
"조옹집 포교나리 휘하 포졸들이 한 짓이라 지는 모리요."
"어서 의원부터 모셔와."
"조옹집 포교께서 잡인 출입을 엄금하라는 지시가 있다는디요?"
"이런 미친, 내가 책임질 테니 퍼뜩 모셔와!"
그렇게 우선 찢어지고 멍든 상처는 봉합했지만, 뼈마디라도 부러졌는지 상쇠 어른의 신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의원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막 옥사 마당으로 나왔다. 포교방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그 새 조옹집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홧김이 방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옹집이 개다리를 뜯으면서 술을 자작하고 있었다.
"무신 죄목으로 상쇠 어른을 잡아온 거여?"
식식거리는 박태수를 흘낏 보고도 조옹집은 대답도 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술이 묻은 입언저리를 혀를 핥으면서 조옹집이 입을 열었다.
"잡아올 만하니 잡아왔지. 내가 생사람 잡을 불한당으로 보이나?"
"죄인을 잡아들일 때도 절차가 있지 않은감? 형방서껀 현령께는 보고하고 한 짓이여?"
"당연하지. 현령께서 내게 전권을 위임하셨다네."
"전권? 시방 사람이 숨 넘어가게 생겼어야. 물고라도 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조옹집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뒈지지 않을 만큼 패라고 했으니, 그런 일이야 없겠지."
너무 뻔뻔하게 나오자 박태수가 할 말을 잃었다. 현령의 위세를 믿고 배짱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 죄명이 뭔겨?"
그제야 조옹집이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더니 육모방망이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려댔다.
"환곡 납입에 협조하지 않았어. 보릿고개 어려울 때 금쪽같은 곡식을 빌려 먹었으면 제때 갚아야지. 양이 많네 곡식이 없네 시치미를 뗄 줄 알면 국법이 무서운 줄도 알아야 옳을 듯해 손 좀 봐주는 참일세."
짐작한 대로였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겠다며 안달을 떨 때부터 낌새가 수상했지만 이런 망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
상쇠 어른이라면 마을에서 살림 형편이 그 중 나은 편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라 해서 막무가내 버틸 분이 아니었다. 본보기였다.
"그래. 어쩔 심산인겨?"
조옹집이 서슬이 퍼레져 으름장을 놓았다.
"환곡 납부에 어떤 구실도 용납지 않을 걸세. 마을마다 전하라고. 어떤 놈이든 제때 갖다 바치지 않으면 사지가 멀쩡하지 못할 거라 말이야. 난 한다면 하는 놈이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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